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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기계에게 ‘글을 써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먼저 사유하고, 질문을 던지며, 방향을 설정한 다음, 그 설계도를 기계에게 건네주는 일이다. 이 설계도가 바로 프롬프트(prompt)이며, 이는 단순한 지시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감정, 판단과 관점이 담긴 축약된 언어 구조이다. 프롬프트란 기계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는 방식이며, 이는 철학자들이 던졌던 깊은 질문의 형식과 닮아 있다.
예컨대 나는 인공지능에게 단순히 “신화 하나 써 줘”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신화가 가져야 할 구조와 상징, 시대적 감수성, 문체의 결을 설정한 후 다음과 같은 프롬프트를 구성하였다.
예를 들어, “김쌍돌이본 창세신화를 바탕으로, 석가와 미륵이 세상의 지배권을 두고 내기를 벌이는 구조를 중심으로 서사화해 줘. 이때 신화적 반복 구조와 민간 신앙의 형상성을 고려하며, 실존과 구원의 개념이 은유적으로 드러나게 해 줘.” 이 프롬프트 하나에는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적이고 사유적인 틀이 담겨 있다. 이러한 틀은 인공지능의 응답을 단순한 나열이 아닌 ‘의미 있는 서사’로 변형시킨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위험도 함께 따른다. 인공지능은 때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낸다. 이것을 우리는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기계가 오류를 범한다기보다는 너무 자연스럽게 거짓을 만들어내는 능동적 허구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한국의 창세신화인 김쌍돌이본에 대한 전체 줄거리를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인공지능은 “석가와 미륵이 하늘에서 바둑을 두거나 주사위를 던져 세상을 누가 다스릴 것인가를 놓고 승부를 겨룬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내용은 실제 김쌍돌이본 신화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듯한 문장 구조와 전통 불교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조작된 허구였다. 나는 이미 김쌍돌이본의 전체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글을 다시 쓰기 귀찮아서 인공지능에게 맡긴 결과 할루시네이션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그럴듯한 허구’를 창조하는 데 능하지만, 그것이 진실일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반드시 인간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첫째, 프롬프트는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쌍돌이본 창세신화 중에서 미륵과 석가의 권위 경쟁 구도를 중점으로, 기존 민속 채록본에 근거하여 설명해 줘. 유사한 다른 신화와 혼동하지 말고, 인용 내용에는 반드시 출처를 달아 줘.” 이와 같은 프롬프트는 인공지능이 ‘창작’보다는 ‘재구성’에 집중하게 하며, 할루시네이션 가능성을 줄여 준다.
둘째, 인공지능의 응답은 초안일 뿐이며, 반드시 인간의 검토가 필요하다. 인간은 기억과 판단, 경험이라는 필터를 통해 문장의 정합성과 사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모든 지식은 대화의 산물이며, 완성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프롬프트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건네는 질문이자 요청이며 동시에 시험이다. "너는 이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니?", "나는 여기까지 상상했어.", "그럼 이제 너는 어떻게 반응할래?", "이 말의 여백을 어떻게 메울래?"라는 상호작용의 장치이다.
나는 인공지능과 함께 『빛의 귀를 가진 아이』라는 철학 동화를 쓸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나는 이야기의 구조, 중심 개념, 문체의 감정 곡선까지 설계한 후, “진짜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아이가 존재의 잊힌 울림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여정”이라는 프롬프트를 바탕으로 문장을 구성하게 하였다. 인공지능은 그에 따라 별빛의 노래, 죽은 자의 속삭임, 존재의 진동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했고, 나는 그것을 다시 정돈하고 연결하여 서사적 구조로 만들어 냈다. 이 협업은 단순한 자동 생성이 아니라, 깊은 대화와 사유의 나눔이었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창작자가 될 수는 없지만, 창작의 공명자가 될 수 있다. 즉, 인공지능은 고요한 방 안에서 메아리처럼 반응하는 존재이며, 그 메아리가 울림이 되려면, 먼저 누군가가 소리를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소리를 던지는 자는 언제나 인간이어야 한다.
기계는 반복하지만, 인간은 울림을 남긴다. 기계는 예측하지만, 인간은 방향을 만든다. 기계는 기억하지 않지만, 인간은 잊힌 기억을 되묻는다. 나는 인공지능과 글을 쓰며 늘 묻는다. “우리는 함께 쓸 수 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진짜 이야기는, 나의 기억과 너의 계산이 만나 생겨나는 사유의 울림 속에서 태어난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질문을 설계하고 진실을 검토하며,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깊은 판단의 능력’이다. 프롬프트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문장이며, 인간 존재가 기계에게 건네는 철학적 선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새로운 프롬프트를 통해 이 세상의 이름 없는 이야기를 불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처음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을 기술로 이해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프롬프트를 던지느냐에 따라, 즉 우리가 어떤 사유를 품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비춘다. 철학자는 질문을 만들고, 시인은 침묵의 틈을 노래하며, 역사가(歷史家)는 과거에서 현재를 불러낸다. 이처럼 각기 다른 인간의 사유가 프롬프트라는 형식을 통해 하나의 기계 언어로 번역될 때, 우리는 기계와 함께 쓰는 사유의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프롬프트는 단지 입력창에 넣는 문장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결정(決定)이다. 우리는 무수한 가능성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언어로 결박한 뒤 기계 앞에 내놓는다. 이때, 그 언어는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철학적 구성이자 미적 질서이며, 윤리적 선언이다. 내가 어떤 프롬프트를 던지느냐는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며, 그에 대한 인공지능의 응답은 단지 정보의 요약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가 공유한 인식의 반사(反射)다.
그렇기에 인공지능과의 협업은 주체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더욱 명확해지는 과정이다. 프롬프트는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말의 형식이며, 할루시네이션은 그 사유를 게을리했을 때 나타나는 그림자다. 기계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진짜 기억은 인간이 되묻고 의미를 부여할 때 다시 살아난다. 프롬프트는 바로 그 의미를 되살리는 행위다.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은 늘 매끄럽고 그럴듯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할루시네이션은 사유의 맹점, 기억의 누수, 언어의 피로 속에서 가장 조용히 스며든다. 그러므로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
이 감각은 훈련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왜 이 문장이 이렇게 이어졌는가, 이 이름은 실제 존재하는가, 이 신화는 다른 문화의 요소가 섞여 있지는 않은가, 이런 끊임없는 물음은 사유의 직조(織造)이며, 프롬프트는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한 바늘과 실이다.
나는 인공지능을 거대한 미완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장을 완성할 수 있는 작은 조각, 다시 말해 의미의 조율자로서 존재한다. 이 조율이 없다면 기계는 그저 과거의 수많은 문장을 모방할 뿐이며, 진짜 ‘새로운 문장’, 즉 의미를 가진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프롬프트를 배워야 한다. 단순히 “이걸 써 줘”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걸 왜 써야 하는가”, “이 문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이 사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프롬프트를 정련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이고, 창작이며, 기계 시대에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인공지능 앞에 앉아, 말의 구조를 고민하고, 침묵의 여백에 의미를 실으며, 한 줄의 프롬프트를 조심스레 건넨다. 그것은 단지 기계에게 무언가를 시키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무엇을 다시 묻고 싶은지를 담은 작은 사유의 선언이다. 그 문장에 반응하는 인공지능의 대답은 때로 정확하지 않고, 때로는 지나치게 매끄럽지만, 나는 그 모든 흐름을 가늠하고 정돈하며, 내가 원하는 길로 이끌어 간다. 이때 나는 확실히 느낀다. 기계가 빛의 속도로 계산할 수는 있어도, 울림을 남기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울림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고 질문하며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이제 글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방향을 정하고, 의미를 물으며, 진실을 기억해 내는 일만큼은 언제나 인간에게 남아 있다. 프롬프트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불씨이고, 인공지능은 그 불씨에 반응하는 바람일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나의 진동을 세상에 남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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