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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통해 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통찰하는 거대한 서사를 구성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신화와 허구를 통해 권력과 질서를 만들어낸 이야기로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엘론 머스크, 빌 게이츠와 같은 현대의 기술 지배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들은 하라리의 통찰을 통해 스스로를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로 인식했다. 하라리는 데이터 종교와 인간 능력의 확장을 예견하며 인류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디지털 혁명을 통해 인간이 물질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인간의 본질을 오독하는 위험을 품는다.
하라리는 인간을 신화 제조 기계로 환원한다. 그는 인간 존재를 뇌와 알고리즘의 산물로 축소한다. 그러나 인간은 계산할 수 없는 신성한 차원을 내포한다.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세계를 타락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인간 내면의 신성을 통해 구원을 찾으려 했다. 현대 기술 문명은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조작하려 한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내면을 깨우치는 데에 방점을 찍는다. 하라리의 논리는 외면적인 진보만을 추구한다. 내면의 신비를 무시한다.
에소테리즘 전통은 인간 존재를 우주의 축소판으로 본다.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기계가 아니다. 그는 별들과 하나로 연결된 존재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과학의 분석적 세계관과 충돌한다. 하지만 에소테리즘은 과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깊이를 설명한다. 하라리는 인간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예언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오히려 인간을 소멸시킬 수 있다.
불교는 무상과 무아를 가르친다. 인간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다. 하라리는 인간의 고정된 진보를 전제한다. 그러나 불교는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하라리의 서사는 인간 중심적 오만을 드러낸다. 불교는 집착을 버리고 공성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라리는 인간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교는 통제 자체가 환상임을 지적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본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나 동물이 아니다. 그는 신성과 연결된 존재다. 하라리는 인간의 초월을 기술적 진보로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이 인간 외부의 기술이 아니라 내면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하라리는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에게 의지할 것을 요청한다.
엘리아데는 신화의 구조를 통해 인간 경험의 보편적 차원을 드러냈다. 그는 『영원회귀의 신화』(미르체아 엘리아데, 2023, 열린책들, p.184)에서 “인간은 신성한 원형을 반복함으로써 의미를 찾는다”고 말했다. 하라리는 신화가 인간을 속이는 이야기라고 본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신화가 인간 삶을 구조화하는 근본적 틀이라고 본다. 하라리는 신화를 해체하지만 새로운 신화를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은 무의미 속으로 추락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인간 정신을 “수수께끼를 향한 질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비를 갈망하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하라리는 인간을 데이터 흐름의 최종 산물로 본다. 그러나 블라가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신비를 해독하고자 하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인간은 데이터를 넘어서려는 존재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언제나 신성과 연결되려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신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는 소통을 시도했다. 인디언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 속에 신성을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로고스를 통해 인간과 신의 경계를 탐구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신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다. 모든 시대의 인간은 신성과의 연결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
하라리는 이런 흐름을 허구로 간주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야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야기 안에서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이 신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을 만들었다. 하라리는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술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인간은 기술 속에서 자유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속박당한다.
우리는 호모 판테이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만물 속에서 신성을 본다. 그는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경외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그는 계산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 그 자체를 축복한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기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술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기술을 삶의 도구로 사용할 뿐 삶의 목적을 기술에 두지 않는다. 그는 내면의 신성을 기술로 대체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신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됨을 깨닫는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경쟁과 정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조화와 연결을 추구한다. 그는 세계를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형제애를 나눈다. 그는 생명을 관리하거나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을 섬긴다.
인간은 다시 호모 판테이스트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시 자연의 언어를 들어야 한다. 인간은 다시 별들과 대화해야 한다. 인간은 다시 땅과 하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시 신성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시 존재의 신비를 경외해야 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서사를 데이터의 흐름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흐름을 넘어서려는 존재다. 인간은 질문하고 깨닫고 경외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존재다. 인간은 우주의 신비를 품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신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성과 하나가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호모 판테이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그래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야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기 전,
호모 판테이스트였다.”
우리는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종족을 나누기 이전에,
우리는 도구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서로를 구별하지 않았고,
이미 별과 강과 숲과 하나였고,
이미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우리는 본래부터
하나였던 존재의 울림 안에서
숨 쉬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성(理性)을 통해 세계를
분리해 이해하려 했다.
호모 루덴스는
놀이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다.
호모 렐리기우스는
신을 경외하며,
거리를 두려 했다.
호모 데우스는
기술을 이용해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
그러나 그 모두 이전에,
우리는 그저 떨리고, 울리고 있었다.
그저 존재했으며,
그저 서로를 구별하지 않고
숨 쉬었다.
그것이 바로,
호모 판테이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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