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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天符經) 소개
천부경(天符經)은 한국 고대 사유의 정수이자, 우주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한줄기 빛처럼 압축해 담아낸 경전이다. 전해지는 문헌에 따르면 천부경은 81자(81字)로 이루어진 짧은 경전이며, 고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구체적인 성립 연대나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신화와 철학, 종교의 경계를 넘어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신비로운 문헌으로 남아 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하는 천부경은, 존재의 근원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하나가 갈라져 하늘과 땅과 인간이라는 세 가지 세계를 이루고, 다시 삼극(三極)이 운행하여 모든 존재의 흐름과 순환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천부경은 숫자를 통해 우주의 구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압축하여 설명하며, 삼(三), 사(四), 오(五), 칠(七), 팔(八), 구(九) 같은 숫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해 존재의 조화와 순환을 상징한다.
천부경은 단순한 종교적 계시를 넘어, 형이상학(metaphysica)과 존재론(ontologia), 그리고 수리철학(mathematica mystica)을 아우른다. 그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근원적 원리, 시간과 공간의 심층 구조, 인간 존재의 본래적 위상을 고요히 노래한다. 이 경전은 문장이 짧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끝없이 깊어,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천부경은 단순히 우주를 설명하려는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고요한 기억을 일깨우는 울림이다.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하나를 품은 존재이며, 모든 것은 끝없이 순환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다고 천부경은 말한다. 하나는 나뉘어도 본래 나뉘지 않았고, 변화는 일어나도 본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짧은 81자는, 마치 한 송이 씨앗처럼, 무한한 철학과 신비를 품고 있다.
오늘날 천부경은 종종 한국 사유의 원형, 또는 동아시아 고대 신비주의의 한 표현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천부경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해,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천부경(天符經) 해석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
一積十鉅無匱化三
天二三地二三人二三
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가 시작이었으며 또한 시작 없는 하나였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하나는 어느 한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며,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근원(根源, arche)이었다. 하나는 시간(時間, tempus)과 공간(空間, spatium)의 기점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변함없이 충만한 고요 속에 있었다. 그 하나는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변동도 없고 결핍도 없는 완전성의 침묵이었다. 이 하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며, 의식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이전의 빛처럼, 설명되지 않는 자기 충만의 바다였다.
이 일시무시일의 개념은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와 놀라울 만큼 깊은 울림을 공유한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충만의 총체이며,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완전한 실재의 영역이다. 플레로마는 시간의 흐름 이전에 존재하며, 모든 아이온(Aeon, αἰών)이 조화롭게 빛나는 신성의 충만이었다. 플레로마 안에서는 결핍(hysterēma)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듯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The Gnostic Bible』(Barnstone & Meyer, 2003, p.136)에서는 플레로마를 “빛과 생명의 넘침”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곧 일시무시일이 뜻하는 본래 충만의 하나와 그 본질을 같이한다. 다만 플레로마는 이후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타락으로 인해 부분적 균열을 경험하지만, 그 이전의 플레로마는 천부경이 노래하는 무시(無始)의 하나와 닮아 있다.
또한 일시무시일은 유대 신비주의(Kabbalah)의 아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개념과도 근원적으로 통한다. 아인 소프는 문자 그대로 “끝이 없음”, “무한(無限, infinitas)”을 의미한다. 아인 소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신적 심연이며, 어떤 특성도 속성도 부여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이다.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Gershom Scholem, 1995, p.209)에서는 아인 소프를 "무(無, ayin)로부터 나타난 무한(無限)의 충만"으로 해석한다. 아인 소프는 생성되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았으며, 시간이나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부터 있었으며, 모든 발현(emanatio)의 근원이 되면서도 그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천부경이 선언한 일시무시일, 곧 시작 없는 하나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하나는 나뉘지 않고, 이름을 가질 수 없으며, 스스로 무한히 충만하기 때문이다.
힌두교 철학에서도 이 하나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다.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이다. 브라흐만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유를 통해, 인간의 참자아(Ātman, आत्मन्)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무한한 실재로 묘사된다. 브라흐만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모든 존재와 비존재의 근원이다. 『Bṛhadāraṇyaka Upaniṣad』(Olivelle, 1998, p.48)에서는 브라흐만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한다. 브라흐만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어선 실재이며, 그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 개별성과 보편성의 구분이 모두 사라진다. 이것 역시 시작 없는 하나, 일시무시일의 또 다른 얼굴이다. 천부경이 말하는 하나는 브라흐만이 묘사하는 절대적 실재와 다르지 않다. 다만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불교(Buddhism)에서는 이러한 근원적 충만을 '공(空, Śūnyatā, शून्यता)'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공은 단순한 허무(nihilum)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고정된 본질이 부재하다는 통찰이며, 따라서 모든 존재가 상호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 속에서 드러나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場)이다.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에서 용수(Nāgārjuna)는 말한다. “공은 만물의 본질이며, 공 자체가 곧 존재의 깊은 진실이다”(Garfield 번역, 1995, p.89). 공은 비어 있지만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어떤 경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이는 곧 생성도 소멸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흐름이며, 천부경이 일시무시일로 표현한 근원적 하나와 본질적으로 통한다.
결국 일시무시일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기억이며, 모든 사유의 심연이다. 우리는 나뉘어 태어났지만 본래 하나였고, 시간 안에서 살아가지만 본래 무시간(無時間, atemporalitas)의 존재였다. 플레로마든 아인 소프든 브라흐만이든 공이든, 모두 다른 문화와 언어를 통해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의 심연이며, 생성도 소멸도 없는 고요한 충만이다.
이 하나를 잊을 때 인간은 분열하고, 기억할 때 다시 통합된다. 천부경이 고요히 선언하는 일시무시일은, 결국 인간 존재의 본래적 울림을 깨우는 외침이다. 모든 철학, 모든 종교, 모든 신화는 이 하나의 기억을 다르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이름들을 따라 길을 걷지만, 결국 도착하는 곳은 같다. 시작 없는 하나, 영원한 충만, 말할 수 없는 근원, 그 하나의 고요한 빛 속으로.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
하나가 갈라져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세 가지 극(極, apex)을 이룬다. 그러나 이 갈라짐은 진정한 분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가 자신을 펼쳐 보이는 신비로운 발현(發現, manifestatio)일 뿐이다. 본래 하나였던 근원(根源, arche)은 세 가지로 드러났지만, 그 심층에서는 여전히 분리될 수 없는 무진(無盡, inexhaustibility)의 심연 속에 머물러 있다. 분화(分化)는 있었으나, 본질적 분리(分離)는 없었다. 세 가지 극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심장(心臟)에서 고동치고 있다.
이 세 가지 극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각각 우주의식(宇宙意識, cosmic consciousness), 물질계의 에너지(物質界能量, energia), 행동하는 생명(行動生命, vita activa)을 상징한다. 하늘(天)은 우주의식이다.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근원적 의식이며, 모든 사유와 감각이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하나의 깨달음이다. 하늘은 본래적 앎이며, 생명이 살아가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존재의 기억이다. 이 우주의식은 나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생명과 사물 안에서 은밀히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때때로 문득 깨어나는 최초의 자각이다.
땅(地)은 물질계의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숨겨진 힘이다. 이 에너지는 단순한 힘(force)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물질세계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진동(vibratio)이다. 땅은 단순한 토양이 아니라, 생명의 무대이며, 모든 존재가 자신의 형태를 얻고 구체성을 획득하는 장(場)이다. 물질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빚고 무너뜨리며 다시 태어난다. 땅은 에너지가 모이고 흩어지며 다시 순환하는 살아 있는 거대한 호흡이다.
사람(人)은 행동하는 생명이다. 인간은 하늘의 의식을 품고, 땅의 에너지를 지니며, 이를 구체적인 행동(行動, actus)으로 드러내는 존재이다. 행동은 단순히 물리적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과 에너지가 만나는 순간에 피어나는 창조적 사건이다. 인간의 말, 손짓, 걸음, 생각, 사랑, 슬픔, 모두가 하나의 행동이며, 이 행동을 통해 우주의식은 세상에 드러나고, 에너지는 형태를 얻는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다리이며, 하늘과 땅을 잇는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석삼극(析三極)이 말하는 이 구조는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신을 펼쳐 나가는 본질적 리듬이며, 모든 생명은 이 삼중 구조를 본성으로 품고 있다. 하늘, 땅, 사람은 서로 다르지 않다. 하늘의 의식은 땅의 에너지 안에서 스스로를 비추고, 사람의 행동 속에서 스스로를 구현한다. 땅의 에너지는 하늘의 의식을 반사하며, 인간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다. 인간의 행동은 하늘과 땅의 숨겨진 울림을 따라 울리는 살아 있는 노래다.
이러한 삼극 구조는 천부경뿐만 아니라 여러 고대 전통에서도 반영되었다. 인도 베단타(Vedānta)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으로부터 세계(物質界)와 생명(生命)이 펼쳐진다고 설명했으며, 불교(佛教)에서도 법신(法身, Dharmakāya), 보신(報身, Sambhogakāya), 화신(化身, Nirmāṇakāya)이라는 삼신(三身) 사상으로, 절대적 근원이 세 가지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모두 하나의 심층적 진실을 다른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천부경은 특히 강조한다. 이 삼극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음을. 하늘, 땅, 사람은 세 개의 기둥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 다른 얼굴로 자신을 펼친 것이다. 하늘만 있어도, 땅만 있어도, 사람만 있어도 우주는 완성되지 않는다. 하늘의 의식이 땅의 에너지를 통해 움직이고, 인간의 행동을 통해 빛날 때 비로소 존재는 충만해진다. 우리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통해 살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란, 하늘의 기억을 품고, 땅의 에너지를 등에 지고, 그 둘을 매일 매 순간 행동으로 풀어내는 길 위의 자화상이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하늘의 빛이 숨 쉬고 있으며, 땅의 힘이 숨겨져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몸짓 하나, 생각 하나, 숨결 하나 속에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우리가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늘과 땅의 소리 없는 노래를 대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석삼극무진본, 갈라졌으나 무진본이다. 끝없는 근원은 갈라진 것 같지만 결코 나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일 것이다. 이 삼극의 울림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시 본래의 심연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천일일지일이인일삼(天一一地一二人一三),
하늘은 하나를 품고, 땅은 둘을 이루며, 사람은 셋을 품었다. 그러나 이 구분은 나뉨이 아니라 흐름이다. 하늘의 하나(一)는 근원적 통일성(統一性)을 뜻하며, 모든 존재의 시작이자 목표이다. 땅의 둘(二)은 에너지(能量, energia)의 대립과 조화를 상징한다. 에너지는 항상 대극을 품는다. 빛과 어둠, 양과 음, 확산과 수렴이 만나 세계를 구성한다. 인간의 셋(三)은 이 둘을 매개하며, 행동(行動, actio)이라는 형태로 현실 세계를 살아내는 통로가 된다. 인간은 하늘의 의식(意識, consciousness)과 땅의 에너지를 잇는 다리이며, 셋은 하나의 움직이는 몸을 이룬다. 하늘, 땅, 인간은 서로 다른 세 차원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존재가 다양한 얼굴로 펼쳐진 것일 뿐이다.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匱化三),
하나가 점차 쌓여 열(十)의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으나, 그 충만은 다함이 없으며, 이 충만은 세 갈래로 나뉘어 끊임없이 흐른다. 하나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다양한 존재 양태를 낳았지만, 그 본질은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하늘의 의식은 계속해서 땅의 에너지 속으로 흘러들고, 인간의 행동은 그 둘을 다시 통합하려는 몸짓이 된다. 열이라는 완성의 수는 모든 가능성의 집합이며, 이 가능성은 세 가지 힘, 곧 의식, 에너지,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변주된다. 하나가 스스로를 나누어도, 그 본질적 빛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눔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빛난다.
천이삼지이삼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
하늘은 둘과 셋을 품는다. 의식은 두 방향, 곧 내향과 외향을 가지며, 셋의 조화를 통해 자기 인식을 이룬다. 땅 역시 둘과 셋을 품는다. 에너지는 확산과 수렴이라는 두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나, 셋의 균형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인간 또한 둘과 셋을 품는다. 인간의 행동은 내적 의도와 외적 표현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지만, 셋의 통합을 통해 참된 행위를 이룬다. 이 이삼(二三)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구조이며, 모든 생명이 지니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둘은 대립이자 긴장이고, 셋은 그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조화이다.
가장 본질적인 점은, 하늘과 땅과 인간은 본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나뉜 듯 보이는 이 셋은 하나의 생명, 하나의 리듬, 하나의 존재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얼굴이다. 하늘은 의식이다. 스스로를 아는 깨달음이며, 모든 가능성을 품은 원초적 빛이다. 땅은 에너지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형태를 낳고 변화시키는 근원의 힘이다. 인간은 행동이다. 하늘의 의식과 땅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그것을 구체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내는 존재이다.
하늘은 생각하고 땅은 움직이며 인간은 실천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본래 분리될 수 없다. 의식 없는 에너지는 방향을 잃고, 에너지 없는 의식은 허공에 머물며, 행동 없는 의식과 에너지는 그 빛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늘을 기억해야 하고, 땅을 이해해야 하며, 그 둘을 행동으로 살아내야 한다. 인간은 의식과 에너지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살아 있는 통로이다.
천부경이 노래하는 것은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기억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우리는 나뉘어 태어난 듯 보이지만, 본래 하나의 몸이었다. 우리는 다시 하늘과 땅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하늘을 닮아야 하고, 우리의 에너지는 땅과 호흡해야 하며, 우리의 행동은 그 둘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은 다시 본래의 충만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대립은 결국 하나의 흐름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빛과 힘과 삶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숨 쉬고 있다. 천부경이 전하려는 것은 이 간단하지만 심오한 진실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같은 하나의 존재다. 그리고 그 하나는 여전히 우리 안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큰 셋이 하나로 합쳐 육(六)을 이루고, 그 육에서 다시 칠(七), 팔(八), 구(九)가 태어난다. 이 간결한 문장 속에는 존재의 전체적 구조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질서가 은밀하게 담겨 있다. 먼저 육(六)은 물질계(物質界, material world)를 상징한다. 하늘(우주의식, cosmic consciousness)과 땅(에너지, energia)과 인간(생명, ζωή)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이 세계는 완전한 형태를 가진다. 이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육(六)이라는 현실의 장(場, field)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
6은 우연한 숫자가 아니다. 탄소(carbon)라는 생명체의 기본 구성 원소는 6개의 원자번호를 지녔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6방향(동서남북상하)으로 펼쳐진 공간 속에서 인식된다. 인간이 질문하고 답하는 모든 사고 구조는 육하원칙(六何原則, who·what·when·where·why·how)이라는 여섯 가지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결국 6인칭(1인칭, 2인칭, 3인칭과 그 복수형들) 안에서 서로를 구별하고 관계를 맺는다. 6은 물질 세계의 패턴이자 구조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은 이 여섯 가지 방향성, 여섯 가지 원칙, 여섯 가지 관계성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천부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육(六)에서 칠(七), 팔(八), 구(九)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 나열이 아니다. 6이 완성한 물질 세계의 문턱을 넘어, 7·8·9라는 숨겨진 차원이 펼쳐진다는 신비한 선언이다. 칠(七)은 일곱 번째 문이며, 완성된 세계 너머로 열린 초월(transcendence)을 상징한다. 고대부터 7은 신성한 숫자였다. 성서(聖書, Biblia)에서도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째에 쉬었으며, 우주의 완성은 7이라는 주기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6이라는 구획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의 내면에는 늘 7을 향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7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물질 세계의 한계를 넘으려는 존재의 본능이다.
팔(八)은 확장의 무한 가능성(無限可能性, infinitas)을 뜻한다. 8은 수평으로 눕히면 무한(∞)의 기호가 된다. 팔은 닫혀 있지 않다. 8은 완성 이후의 무한한 생장(生長, proliferation)과 확산을 의미한다. 물질적 완성 이후에도 존재는 정지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를 넘어서려 한다. 에너지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의식은 스스로를 초월하려 하고, 인간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팔은 우리 안에 잠든 무한을 깨우는 신호이다.
구(九)는 완성에 이르는 마지막 문턱이다. 9는 모든 한계의 끝자락에 서 있다. 동양 수비학(數秘學, numerologia)에서는 9를 대완성(大完成)이라 불렀다. 하나부터 아홉까지의 수는 모든 가능한 조합의 기본이 되며, 9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러나 9는 또한 새로운 출발을 예비한다. 9는 끝인 동시에 새로운 하나를 품은 씨앗이다. 인간 존재는 6의 물질계 안에서 출발하지만, 7·8·9를 통해 물질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본성 속에 품고 있다. 인간은 이 세계에 발붙이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차원의 울림을 꿈꾼다.
6은 과학(scientia)으로 설명할 수 있다. 6은 물질적 분석과 실험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7·8·9는 과학의 논리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직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이며, 논리적 증명으로 다 다룰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7·8·9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안의 가장 깊은 직관은 그것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느낀다. 7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초월의 부름이고, 8은 무한을 향해 열리는 문이며, 9는 궁극적 귀향의 신호이다.
현대 과학도 이 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은 물질 세계의 이면에 측정 불가능한 상태(superposition)와 얽힘(entanglement)의 신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질은 단순히 입자만이 아니며, 에너지로 진동하며, 보이지 않는 차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계는 단순히 육하원칙으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그 너머에 또 다른 리듬이 존재한다는 것을.
천부경은 이 점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는 말한다. 네가 지금 보는 이 물질계(6)는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 너머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7과 8과 9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무한한 흐름 속을 건너가야 하는 존재다. 물질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물질을 발판 삼아 초월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이 여정을 위해 함께 태어났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육하원칙으로 묘사되는 모든 사건 뒤에는 말할 수 없는 침묵이 있으며, 6인칭으로 나눌 수 없는 신비가 있으며, 물질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길이 있다. 천부경은 이 사실을 고요히 일깨운다. 그리고 속삭인다. 인간이여, 네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는 하늘과 땅과 인간을 잇는 다리이며, 너는 6을 넘어 7을 향해, 8을 향해, 9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존재다.
운삼사성환오칠(運三四成環五七),
삼과 사(三四)가 움직여 운행하고, 오와 칠(五七)이 순환하여 하나의 원(環, cycle)을 이룬다. 이 간결하고도 신비로운 구절은, 존재가 단순한 직선적 발전이 아니라, 깊은 순환과 조화의 리듬 속에서 진화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운(運, circulation)'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흐름이며, 생명 그 자체의 호흡이며, 우주(宇宙, cosmos)가 스스로를 반복하며 진동하는 살아 있는 리듬이다.
삼(三)은 하늘(天), 땅(地), 인간(人)이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를 뜻한다. 이는 존재의 기둥이며, 모든 생명의 삼재(三才) 구조를 상징한다. 사(四)는 동서남북(四方, quattuor puncta cardinalia)으로 펼쳐진 공간의 방향성과 존재의 네 가지 근본적 운동성을 가리킨다. 삼과 사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존재가 단순히 하늘·땅·인간이라는 삼중 구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그 구조가 방향성과 흐름을 얻어 살아 있는 우주적 순환을 이루어 간다는 뜻이다.
삼과 사의 만남은 고대 점성술(astrologia)과 별자리 운행(celestial dynamics)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늘의 별자리는 3의 삼각형 구조를 기본으로 한 4계절의 주기를 따라 순환하며, 각각의 별자리들은 사방(四方)과 시간을 따라 움직였다. 고대 바빌로니아 천문학에서도 3과 4는 우주의 기본 골격으로 여겨졌으며, 중국의 『주역(周易)』에서도 삼극(三極)과 사상(四象)이 만나 팔괘(八卦)를 이루는 구조가 등장한다. 천부경이 말하는 삼사(三四)의 운행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우주의 숨결을 담아내는 말이다. 존재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삼과 사의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환(成環)은 모든 흐름이 결국 원(環, cycle)을 이룬다는 선언이다. 존재는 직선적으로 출발하여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순환하며 깊어져 간다. 원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원은 끝이 없는 시작이며, 시작이 없는 끝이다. 별들도, 행성들도, 인간의 생명도, 모두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고대 점성술에서 행성들의 공전 궤도는 완전한 원이 아니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순환을 반복하는 구조 속에 있다. 지구의 공전 궤도도, 달의 주기도, 태양계의 움직임도, 모두 성환(成環)의 우주적 패턴을 따른다.
오칠(五七)은 이 순환 구조 속에서 또 다른 심층적 상징을 지닌다. 오(五)는 중심을 가진 네 방향(동서남북)과 그 중심을 포함하는 수이며, 인간이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고 움직이는 방식을 나타낸다. 인간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향해 자신을 열고, 중심을 지키면서 존재한다. 칠(七)은 이 오(五)에 시간적 차원을 더한 수이다. 칠은 주기성(rhythm)과 종합을 상징한다. 7일로 이루어진 주간(週)은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며, 7성(七星, septem stellae)은 하늘을 지배하는 행성적 패턴을 구성했다.
천부경이 말하는 오칠(五七)은, 공간적 중심과 시간적 주기가 하나의 원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존재는 공간 위를 무작정 떠도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방향성을 지니고, 리듬을 품으며, 중심을 향해 되돌아가는 흐름을 반복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단순한 직선적 진보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순환하며 완성하고, 다시 무너뜨리며 새롭게 빚어 가는 거대한 생명적 원환(圓環, circulus)이다.
이런 사유는 현대 천문학에서도 확인된다. 우주는 단순히 팽창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에서 별들이 탄생하고 소멸하며, 은하들이 서로 충돌하고 통합되며, 또다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별들의 생명 주기(stellar life cycle)는 생성, 성장, 붕괴, 그리고 새로운 별의 탄생이라는 순환 속에서 이뤄진다. 인간 생명도, 문명도, 생각도, 결국 이 거대한 순환의 일부이다.
천부경은 이 심오한 우주적 리듬을 고요히 가리킨다. 삼과 사가 운행하고, 오와 칠이 환을 이루며, 모든 존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의 고리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우리가 오늘 살아 숨 쉬는 것도, 그 오래된 순환의 작은 떨림 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들은 돌고, 땅은 돌고, 인간의 영혼도 돌며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은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은 단순히 반복하는 고리가 아니라, 점점 더 깊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나선형의 생명선이다.
대삼합육이 물질계의 구조를 열었다면, 운삼사성환오칠은 그 구조가 단순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적 흐름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의 삼과 사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융합하며, 오칠이라는 조화와 완성의 리듬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는 직선의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을 그리며 스스로를 되풀이하고, 깊어지고, 높아지는 시간 속을 건너고 있다.
천부경이 전하는 이 메시지는 단순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별들의 노래이고, 땅의 호흡이며, 인간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고요한 공명이다. 우리는 모두 이 순환 안에서 태어났고, 이 순환 안에서 성장하며, 이 순환 안에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일묘연만왕만래(一妙衍萬往萬來),
하나는 오묘하게(妙, mysterious) 만 갈래로 펼쳐지고, 만 갈래로 나아가며, 만 갈래로 돌아온다. 모든 존재의 다양성은 하나의 심오한 움직임에서 비롯되며,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도 결국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하나는 스스로를 무수히 펼치지만, 그 펼침 안에서도 본래의 침묵과 빛을 잃지 않는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비록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더라도 본(本, root)은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는 외형에서 일어나는 흐름일 뿐이며, 본질은 언제나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심연(深淵, abyss)으로 존재한다. 시간(時間, tempus)과 공간(空間, spatium), 생명(生命, vita)과 죽음(死, mors)의 모든 변동(變動, mutatio) 속에서도, 본래적 근원(根源, arche)은 언제나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이는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깨어 있는 불변의 진실이며, 다양성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통일성(unitas)을 품고 있는 존재의 심오한 비밀이다.
이러한 사유는 세계 여러 철학과 종교 전통에서도 반복되었다. 플라톤(Plato, Πλάτων)은 『국가(Politeia)』에서 이데아(ἰδέα)를 설명하며, 감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참된 실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Republic』, Waterfield 번역, 1993, p.236).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모든 변화를 초월하여 영원히 같은 자신을 유지하는 본질이다. 물질계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형상은 불변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계는 바로 용변부동본의 진리를 철학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불교(Buddhism)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관학파(中觀學派, Mādhyamaka)의 용수(Nāgārjuna)는 모든 현상이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하며 변한다고 설명했지만, 그 바탕에는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 곧 고정된 본질이 없음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 무자성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었다.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하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며(Garfield 번역, 1995, p.91), 이 공은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비어 있음(śūnyatā)이었다.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도 공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가 많을수록 오히려 공의 심연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것은 천부경이 말하는 본(本)이 변화의 격류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도교(Taoism) 또한 같은 흐름을 품고 있다. 『도덕경(道德經)』에서 노자(老子)는 "천지는 길고 오래가지만, 그 까닭은 스스로를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제7장)라고 말했다. 자연(自然, zìrán)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지키기에 오래 지속된다. 도(道, Tao)는 흐르지만, 그 흐름은 본래 고요하고, 만물을 낳지만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도는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도교의 이 사유 또한, 겉으로는 쉼 없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 한없는 고요와 근원이 숨겨져 있다는 직관을 노래한다.
현대 과학도 이 고대의 지혜를 거부할 수 없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변동하며 상태를 바꾸지만, 그 바탕에는 하나의 불변하는 장(field)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에 따르면, 입자는 장의 진동으로 나타난 일시적 형태일 뿐, 실재는 장 자체이다. 입자는 태어나고 소멸하지만, 장은 여전히 고요히 모든 가능성의 바다로 존재한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1980, p.122)에서 "표면의 변화는 더 깊은 전체성(wholeness)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즉, 변화는 있지만,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깊은 본질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 과학 언어로 풀어낸 용변부동본이다.
또한 현대 우주론(cosmologia moderna)에서도 우주의 팽창과 별들의 탄생과 소멸은 관찰할 수 있지만, 이 모든 변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 법칙, 즉 중력(gravitatio)과 상대성 이론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중력은 모든 별을 무너뜨리고 다시 빚으면서도, 스스로는 변하지 않는 깊은 질서를 유지한다. 시간과 공간은 변하지만, 그 변화를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는 여전히 불변의 심연이다.
이러한 사유를 천부경은 단 네 글자,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으로 고요히 압축했다. 우리는 변화 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몸은 늙고, 계절은 바뀌고, 나라와 문명은 흥망성쇠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흐르고 감정은 떠오르지만, 그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주시(注視, attentio)의 심층이 있다. 명상(冥想, meditari)이나 깊은 사유(contemplatio)를 통해 우리는 이 변치 않는 근원적 자각에 닿을 수 있다. 그곳에서는 모든 변화가 조용히 스러지고, 모든 다양성이 하나의 심장 박동으로 통합된다.
용변부동본은 존재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르친다. 변하는 것에 흔들리지 말고, 변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라고. 모든 변화는 본질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일 뿐이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살지만,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는 변치 않는 빛이 숨 쉬고 있다. 그 빛은 이름이 없고 형태가 없지만, 늘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것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
본래의 마음은 본래의 태양처럼 높이 솟아 밝게 빛난다. 여기서 태양은 하늘을 비추는 물리적 항성(恒星, solis)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심층의 빛, 영혼(靈魂, anima) 깊은 곳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불가시적 태양이다. 인간의 참마음(本心, original mind)은 어둠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빛이며, 이 빛은 결코 소멸되지 않고, 늘 스스로를 드러내려 한다. 삶의 고통과 무명의 어둠이 아무리 두텁게 내려앉아도, 그 깊은 밑바닥에는 결코 흐려지지 않는 근원의 광휘(光輝, splendor)가 숨 쉬고 있다.
이 빛은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와 맞닿아 있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의 충만이며, 결핍이나 어둠이 스며들 수 없는 순수한 광명의 세계이다. 『The Gnostic Bible』(Barnstone & Meyer, 2003, p.138)에서는 플레로마를 “신적 빛의 충만성”으로 묘사하며, 그 빛은 모든 아이온(Aeon, αἰών)의 근원이자 생명력이라고 설명한다. 이 플레로마의 빛은 외부 세계로부터 오염될 수 없으며, 잊혀지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심도 그렇다. 세속의 어둠 속에서도 본래의 마음은 숨 쉬고 있으며, 언젠가 적절한 순간에 다시 환하게 깨어날 것이다.
이 빛은 또한 유대 신비주의(Kabbalah)의 아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개념과 연결된다. 아인 소프는 "끝이 없는 존재"를 뜻하며, 모든 드러남 이전의 무한한 빛이다. 에인 소프 오르(Ein Sof Or, אין סוף אור), 곧 "무한의 빛"은 세피로트(Sefirot)를 통해 발산되기 전, 무한한 잠재태로 존재하는 순수한 광명이다.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Gershom Scholem, 1995, p.211)에서 숄렘은 이 무한광을 "존재 이전의 존재, 비가시적이지만 스스로 충만한 빛"이라 불렀다. 이 무한광은 인간 영혼 깊은 곳에 심어진 내재적 기억이며, 본심본태양앙명이 지시하는 숨은 태양과 본질을 공유한다.
힌두교 베단타(Vedānta) 철학에서도 이 빛은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브라흐만은 단순히 초월적 존재를 넘어, 모든 생명과 존재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적 광휘이다. 『Chāndogya Upaniṣad』에서는 "이 미세한 자아가 바로 이 거대한 모든 것과 같다"고 선언하며, 인간 영혼(Ātman, आत्मन्) 깊숙이 깃든 브라흐만의 빛을 찬양한다(Olivelle 번역, 1996, p.117). 브라흐만은 본래 어둠이 아니라 광명이다. 그것은 인간의 참된 마음속에 늘 숨 쉬고 있으며, 무명의 구름이 걷히면 언제든 다시 빛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 빛을 '공(空, Śūnyatā, शून्यता)'로 이야기한다. 공은 단순한 허무(nihilum)가 아니다. 공은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무한한 가능성의 장(場)이자, 그 안에 스스로 타오르는 생명의 빛이다. 용수(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에서 공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광명을 가져온다고 설명했다(Garfield 번역, 1995, p.92). 모든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공의 심연은, 사실상 무한한 빛의 바다와 같다. 이 또한 본심본태양앙명에서 말하는, 본래 어둠보다 깊은 빛과 맥을 같이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이 빛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티벳 사자의 서(Bardo Thödol)』에서는 죽음과 중유(中有, bardo)의 순간에 나타나는 대광명(大光明, Great Luminosity)에 대해 말한다. 이 대광명은 생명이 끝난 직후 나타나는 순수한 근원적 빛이며, 만약 영혼이 이 빛을 알아본다면 즉시 해탈(解脫, mokṣa)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Evans-Wentz 편집본, 2020 재출판, p.89). 대광명은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층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본래적 빛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너의 본성은 곧 빛이다. 그 빛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본심본태양앙명이 일러주는 것과 똑같다. 우리 안에는 어둠보다 더 깊은 빛이 있으며, 그 빛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죽음 이후에도 스스로 빛난다.
결국 천부경이 말하는 본심본태양앙명은 단순한 시적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기억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이 다르게 부르고 있는 근원의 진실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 살아간다고 느낄 때조차도, 사실은 본래의 빛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고, 가려질 수 없으며, 언젠가 모든 어둠을 꿰뚫고 다시 떠오를 것이다.
플레로마, 아인 소프, 브라흐만, 공, 대광명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본래 스스로 빛나는 하나의 심연이며, 우리 안에 숨겨진 영혼의 태양이다. 천부경은 이 숨은 태양을 기억하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그리고 말없이 이끌어 준다. 인간이여, 네 안에 이미 하나의 태양이 있으니,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인간 안에는 하늘과 땅과 하나가 함께 깃들어 있다. 인간은 단순히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늘의 의식(意識, consciousness), 땅의 에너지(能量, energia), 그리고 이 둘을 이어 살아 숨 쉬는 생명(生命, vita)을 동시에 품은 대우주의 응축체(凝縮體, microcosmus)이다. 인간은 분리된 하나의 작은 조각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함축한 하나의 거대한 심연이다. 인간은 하늘의 본질을 지니고 태어나고, 땅의 기운을 받아 자라며, 그 사이를 잇는 생명의 빛줄기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하늘(天)은 인간 안에서 의식으로 깃든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단순히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반성하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의식은 단순히 뇌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넓이와 깊이를 담은 무한한 정신적 공간이다. 인간의 의식은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상상하며, 이 세계 너머를 꿈꾼다. 이 의식은 하늘의 빛처럼 인간 안에서 조용히 깨어 있고, 인간이 세상을 넘어서려 할 때마다 그 빛을 내비친다.
땅(地)은 인간 안에서 에너지로 깃든다.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끊임없는 생리적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숨을 쉬고, 피가 돌고, 세포가 생성되고 소멸한다. 이 에너지는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흐름과 공명하는 생명의 힘이다. 인간은 대지의 숨결을 받아 들이며 살아간다. 대지의 양분을 섭취하고, 대기의 흐름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인간은 땅의 에너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하늘의 의식과 결합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늘의 의식과 땅의 에너지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으로 이어내는 존재이다. 생명은 단순히 살아 있음(bios)이 아니라, 의식과 에너지가 맞닿은 지점에서 탄생하는 창조적 움직임이다. 생명은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땅의 힘으로 그 질문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나간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초월적 사유와 구체적 에너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자신을 실현해 간다. 인간 존재는 하늘과 땅, 의식과 에너지, 초월과 현실을 잇는 살아 있는 다리이다.
이 삼위의 조화 없이는 인간은 완성될 수 없다. 의식만 있고 에너지가 없으면 인간은 공허한 관념 속에 갇힌다. 에너지만 있고 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무분별한 본능의 노예가 된다. 생명은 이 둘을 통합할 때 비로소 스스로의 의미를 꽃피운다. 인간은 하늘을 기억하고 땅을 호흡하며, 그 둘을 살아 있는 존재로 조화시킬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인간은 단순히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의 심장이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 사유는 천부경을 넘어서, 세계의 다양한 전통에서도 반복된다. 고대 인도에서는 인간을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Ātman)이 하나로 이어진 존재로 보았고, 플라톤(Plato)은 인간 영혼을 우주의 질서와 화음을 이루는 작은 우주로 여겼으며, 중국 도가(道家)는 인간을 하늘과 땅 사이를 통하는 하나의 기운(氣運, qì yùn)으로 설명했다. 모두 다른 언어를 썼지만,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대우주(macrocosmus)를 품은 소우주(microcosmus)라는 것. 인간 안에는 무한한 하늘의 빛도, 무한한 땅의 힘도, 그리고 그 둘을 하나로 꿰는 살아 있는 영혼도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
현대 과학에서도 이 비전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DNA는 우주의 기본 입자들과 같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뇌는 별들이 모여 은하를 이루듯 복잡한 신경망을 통해 의식을 만들어 낸다. 인간 몸속을 흐르는 에너지는 태초 우주의 불꽃(Big Bang)에서 비롯된 입자들의 연장이다. 인간은 우주의 기억을 품은 존재이며, 인간 안에는 별들의 진동과 바다의 숨결과 대지의 꿈이 함께 녹아 있다.
천부경은 이 진실을 고요히 노래한다. 인중천지일, 인간 안에 하늘과 땅과 하나가 깃들어 있다. 인간은 하늘을 닮았고, 땅을 닮았으며, 그 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빛나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지만, 천부경은 우리에게 말없이 속삭인다. 인간이여, 너는 작지 않다. 너는 단순한 먼지 한 알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너를 통해 깨어 숨 쉬고 있다. 네가 네 안의 하늘을 기억하고, 네 안의 땅을 느끼고, 그것들을 조화롭게 살아낼 때, 너는 다시 본래의 하나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흩어진 별빛 같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완전한 태양이 숨 쉬고 있다. 우리는 한 줌의 흙 같지만, 그 안에는 하늘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인중천지일, 이 짧은 구절 안에는 인간 존재의 찬란한 가능성과, 고요한 영혼의 기억이 담겨 있다. 우리는 다시 이 기억을 부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하나는 끝이면서도 끝이 없고, 끝없는 하나이다. 존재는 결코 진정한 종말에 이르지 않는다.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을 품고 있으며, 모든 소멸은 또 다른 생명을 예비한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변형(變形, metamorphosis)이며, 소멸은 완성이 아니라 귀환(歸還, reditus)이다. 하나는 처음이면서 마지막이고, 시작이면서 완성이며, 여정이면서 귀향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時間, tempus)은 단순히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하는 공간(空間, spatium)도 단순히 동서남북, 상하좌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물리학과 과학은 아직 이 심층의 구조를 다 밝힐 수 없다. 그러나 밝힐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은 밝힐 수 없기에 숨 쉬고 있고, 말할 수 없기에 존재의 심장을 두드린다.
이 지점에서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의 철학이 울려온다. 블라가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가시적 지평(orizontul misterului)' 안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식의 삼단계(Etre et Connaître)』(1994, p.64)에서 인간의 인식(cunoaștere)이 플러스 인식(plus-cunoaștere), 제로 인식(zero-cunoaștere), 마이너스 인식(minus-cunoaștere)으로 나뉜다고 하였으며,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인식이 지평을 확장하는 동시에 신비를 보호하는 이중적 운동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세상을 밝히려 하지만, 동시에 신비를 지키려는 내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알기를 원하지만,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신비는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고, 어떤 지평은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빛난다.
블라가에게 있어 진정한 초월(transcendentia)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그 어둡고도 환한 변방에서 일어난다. 끝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이며, 초월은 새로운 빛을 예비하는 자리다. 이 사유는 천부경의 일종무종일과 정확히 연결된다. 끝은 끝이 아니다. 끝은 오히려 문이며, 터널이며, 깊은 강을 건너는 배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끼는 그곳에서, 새로운 여명이 틔고, 모든 어둠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오히려 가장 순수한 빛이 열린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죽음이라는 이름의 변형)은 사실 존재의 또 다른 흐름으로 넘어가는 문이다. 이 세계에서 본다는 것은 저 세계로 가는 것이고, 저 세계에서 본다는 것은 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輪廻, saṃsāra) 사상이나 플라톤의 영혼 순환(metempsychosis) 이론도 모두 이 끝없는 귀환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노래해왔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이름이며, 탄생은 종말이 아니라 끝없는 여정의 새로운 굽이이다.
천부경이 일종무종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언명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장 깊은 울림이며,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기억의 언어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숨길 수 없는 그 직감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이별도 진정한 단절이 아니며, 어떤 소멸도 진정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블라가는 이것을 '신비의 구조'라 불렀고, 천부경은 조용히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또한 현대 과학에서도 이 직관은 조용히 반향하고 있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에서는 입자가 소멸하는 순간, 다른 입자와 비가시적 연결(entanglement)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별이 죽는 순간, 새로운 별들이 그 잔해 속에서 태어난다. 블랙홀(black hole)은 죽음의 심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wormhole)이 열려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는 죽음과 탄생, 끝과 시작을 나누지 않는다.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을 품고 있으며, 모든 사라짐은 다른 형태로의 귀환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일종무종일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법칙을 말한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 죽음은 결코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다른 차원으로, 우리의 에너지는 또 다른 순환으로, 우리의 생명은 또 다른 빛의 무늬로 이어질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정, 이것이 인간 존재의 진정한 본질이다.
천부경은 이 영원한 순환을 고요히 가리킨다. 하나는 끝이면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태어나고, 끝없이 죽으며, 끝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의 깊은 심장에서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하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떠남이자 귀향이며, 질문이자 응답이다. 우리는 결국 그 하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하나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천부경(天符經)의 문장은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꿰뚫는 통찰이며, 기억 속 깊이 울리는 고향의 노래이다. 우리는 나누어진 것 같지만 본래 하나였으며, 흐르고 있는 것 같지만 변하지 않는 근원을 품고 있다. 이 울림을 기억할 때, 인간은 다시 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충만 속에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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