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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우르고스적 질서와 인간 이데올로기의 변형영지주의 관점에서 비판」

 

목차

1. 서론

1.1. 문제 제기: 현대 인간 사회는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에 물든 것인가?

1.2. 연구 목적과 방법론: 데미우르고스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원과 현대적 변형을 밝히고, 플레로마적 대안을 모색

2. 데미우르고스란 무엇인가영지주의 신화와 존재론적 구분

2.1. 『요한의 비밀서』와 고대 영지주의 문헌의 핵심 인용

2.2. 참된 (The One) 데미우르고스(또는Yaldabaoth) 존재론적 이원론

2.3. 보이는 세계와 참된 세계: 현실과 초월의 분리

3. 데미우르고스를 따르는 삶의 구조적 특징

3.1. 물질 숭배와 권력에 대한 집착

3.2. 법과 규칙의 절대화: 질서의 허구화

3.3. 존재의 본질을 가리는 환상의 구조마야(māyā) 개념의 재해석

4. 데미우르고스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변형이데올로기의 유사신화적 구조

4.1. 민족주의: 20세기 독재 정권의 구조와 신성화

4.2. 전체주의: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의 데미우르고스적 성격

4.3. 과학주의: 과학 만능주의와 영성 부정, 영지주의적 인식 거부

4.4. 자본주의 신화: 소비주의 광고의 플라톤적 그림자 극장

4.5. 종교 근본주의: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의 우상화

4.6. 정보주의: 데이터주의적 인간관의 도래유발 하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5. 플레로마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 자유, 회복의 존재론

5.1. 플레로마란 무엇인가: 충만의 세계, 원형적 본래성

5.2. 참된 (Gnosis) 영혼의 회복구원의 내적 계시

5.3. 데미우르고스적 인간과 플레로마적 인간의 존재 양식 비교

6. 데미우르고스적 세상을 인식

6.1. 데미우르고스적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 구원의 출발

6.2. 현재 인류의 갈림길: 환상의 가속화인가, 존재의 회복인가

7. 결론

 

국문 개요

 

논문은 고대 영지주의 신화의 핵심 개념인 데미우르고스(Demiurge) 중심으로, 현대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회복 가능성을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차원에서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데미우르고스는 단지 고대의 신화적 조형물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인간 존재를 규율하는 근대적 구조화의 은유이자 상징으로 재해석된다. 특히 논문은 영지주의적 이원론플레로마(pleroma) 초월적 충만성과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의 감각적 세계 사이의 본질적 단절 오늘날의 실재 인식 인간 존재의 조건에 적용함으로써, 형상화된 신화를 넘어선 철학적 사유의 장을 연다.

 

1장에서는 현대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질서가 어째서 데미우르고스적 질서로 간주될 있는지를 문제 제기하며, 이에 대한 분석틀로서 영지주의적 존재론과 현대철학, 심리학, 종교학의 교차점을 설정한다. 2장은 『요한의 비밀서』와 『토마스 복음서』 고대 영지주의 문헌에 나타난 데미우르고스와 참된 , 플레로마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을 정리하며, 데미우르고스가 무지를 전능으로 착각하고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을 환상과 거짓된 질서에 가두는 기제를 해석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는 단지 피조물이 아니라, 무지를 내부화한 존재, 자기를 잊은 자로서의 실존으로 파악된다.

 

3장에서는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구조적 양상을 분석한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집착, 법과 규범의 절대화, 존재를 감싸는 환상적 기호의 체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적 심연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차단함을 지적한다. 특히마야(māyā)’ 개념을 통해 이러한 현실 구성의 허위성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존재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 내면화된 데미우르고스 상태로 전락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4장은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적 질서가 현대 이데올로기들 속에서 어떻게 유사신화적 방식으로 재현되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민족주의, 전체주의, 과학주의, 자본주의, 종교 근본주의, 정보주의는 각각 데미우르고스의 속성을 계승하며, 인간의 실재 인식 구조를 감각적 환상과 외부적 통제로 구성된 체계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주의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존재의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알고리즘과 기계의 판단에 의존하는 신인류적 사유의 전환을 비판하며, 이데올로기의 기술화가 어떻게 플레로마적 감각을 제거하는지를 제시한다.

 

5장에서는 플레로마의 존재론적 함의를 해석함으로써 데미우르고스적 인간과 플레로마적 인간의 존재 양식을 대조한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천상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원형적 충만성이며, 인간이 자기를 기억함으로써 회복할 있는 실재의 심연이다. 참된 (gnosis)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아니라, 내면에서 솟는 기억이며, 인간은 이러한 앎을 통해 자기 자신 안의 신성과 접속한다. 플레로마적 인간은 외부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존재 자체의 진동을 살아내는 자이며, 상징과 침묵, 기억과 자유의 방식으로 실재를 조응하는 자이다. 이에 비해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외부 기호와 , 질서에 의해 구성된 존재로서, 진정한 자유를 상실한 반복과 순응 속에 머문다.

 

마지막 6장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 인류가 마주한 문명적 전환의 문턱, 환상의 가속화와 존재의 회복이라는 갈림길을 제시한다. 인간은 기술적 환상 속에서 자기 존재의 중심을 상실할 수도 있고, 혹은 기억을 회복하고 실재에 다시 접속하는 새로운 존재가 수도 있다. 영지주의의 사유는 갈림길에서 존재를 해석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내면에서 발현시키는 앎의 길을 열어 준다.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출발이며, 인식은 인간 존재를 다시 존재하게 한다. 존재는 다시 질문을 시작해야 하며, 질문은 신을 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한다.

 

논문은 고대 신화와 현대 구조를 하나의 철학적 수직선 위에서 재해석하며, 실재에 대한 감각, 존재의 본래성, 앎의 내면성이라는 핵심 철학적 명제를 통해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사유는 단지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기억의 사건이며, 존재론적 저항이자 앎의 귀환이다.

주제어: 데미우르고스, 플레로마, 영지주의, 이데올로기, 존재론, 인간, , 신화, 회복, 구조비판

 

 

 

1. 서론

 

 

1.1. 문제 제기 현대 인간 사회는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에 물든 것인가?

 

현대 인간 사회는 실로 다양한 정치체제와 경제구조, 문화와 종교, 기술과 과학의 장을 펼치며 표면적으로는 어느 시대보다도 복합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삶을 표방한다. 그러나 다층적 다양성 이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구조적 패턴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구축한 세계 안에서 오히려 자신을 감금하는, 실재의 허위적 재현 구조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의 반복이다. 질서는 플레로마적 실재를 잃어버린 , 법과 형상, 정보와 이미지, 국가와 시장, 윤리와 이념의 이름으로 존재를 구조화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잊도록 만든다. 데미우르고스는 이상 고대 신화 반신적 존재가 아니라, 현대 이데올로기 구조 안에서 재귀적으로 현현하는 실재의 왜곡 장치이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얄다바오트는 참된 신의 계시를 알지 못한 세계를 창조하며, “나는 신이다.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선언한다(로빈슨, 2016, p. 121). 선언은 단지 고대 신화적 오만의 진술이 아니라, 인간이 실재의 기원을 잊고, 자신이 만든 질서와 구조를 실재 자체로 착각하게 되는 존재론적 무지의 선언이다. 현대 사회는 바로 얄다바오트의 선언을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반복한다. 국가주의, 과학주의, 자본주의, 정보주의 등은 모두질서 말하며,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것들은 존재 자체의 빛을 가리는 환상적 구조, 플레로마로부터 단절된 세계의 파생적 질서일 뿐이다.

 

이러한 사유는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말한 gândire distructivă(파괴적 사고) 개념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블라가는 인간의 인식이 신성의 중심으로 접근할수록, 인식은 오히려 신성 자체를 파괴하거나 위장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이 구축하는 질서와 지식은 대부분 신성의 본질을 검열(cenzura transcendentă) 잔존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Blaga, 1931, p. 51). 이러한 관점에서 , 현대 이데올로기들은 데미우르고스적 인식의 반복이며, 인간은(Gnosis)’ 구조를 잃고, ‘형상과 구조 안에서 존재를 소비하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이러한 현상을존재의 망각(Vergessenheit des Seins)”이라 불렀다. 기술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존재를 사유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활용 가능한도구성(zuhandenheit)’으로 간주하며, 실재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하이데거, 1998). 데미우르고스적 질서란 존재망각의 체계화이며, 인간이 세계 내에서 존재하지 않고 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부속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C.G. Jung) 『아이온』에서 데미우르고스적 자아 구조를그림자(shadow)’ 투사로 해석하며, 인간이 외부 세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더욱 왜곡된다고 경고한다(, 2011, p. 214). 현대 인간은 이미지와 데이터, 언어와 법의 구조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는 진정한 자아(Self)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자기소외의 회로일 있다. 인간은 실재를 체험하지 않고, 실재의 시뮬라크르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결과 존재는 가벼워지고, 앎은 지워지며, 삶은거짓 신의 연극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종교적 회심이나 윤리적 경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인식론의 철학적 요청이다.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에 물든 인간은 이상 세계를살아내는존재가 아니라, ‘해석되고 조작되는기호적 구성물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제도적 해방이나 윤리적 갱신이 아니라, 플레로마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며, 영지(Gnosis)라는 앎의 존재론적 형식으로의 귀환이다. 이것이야말로 데미우르고스의 가면을 벗기고, 참된 신의 빛을 회복하려는 존재의 고백이며,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묻고, 해체하며, 다시 구성해야 질문이다.

 

1.2. 연구 목적과 방법론데미우르고스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원과 현대적 변형을 밝히고, 플레로마적 대안을 모색

 

연구의 목적은 고대 영지주의(Gnosis) 신화와 철학에 등장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 개념을 단지 종교사적 존재론으로서가 아니라, 현대 이데올로기 분석의 메타포적 구조로 재해석하는 데에 있다. 『요한의 비밀서』를 비롯한 고대 영지주의 문헌은 물질 세계와 질서를 신적 권위의 모방이자 타락으로 보았으며, 이로부터 벗어나 플레로마(Pleroma) ― 충만한 실재의 원천로의 귀환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구조는 단지 고대의 우주론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현대 인간 사회의 이념적 구조를 인식론적으로 비판할 있는 철학적 도식을 제공한다.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그의 사유는 이미 특정한 질서와 언어, 권력과 지식의 구조 속에서 배치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대개 '자연스러운 '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연구는 그러한 구조국가주의, 전체주의, 과학주의, 자본주의 신화, 종교 근본주의, 정보주의 모두 데미우르고스적 질서, 플레로마의 빛을 가리고 왜곡된 신성을 정당화하는 유사신화적 구조라고 보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데미우르고스 개념의 철학적 기원을 고대 영지주의 문헌, 플라톤 철학의 변형, 신플라톤주의 중세 이단신학, 그리고 근대 이후의 비주류 인식론(Blaga, Eliade, Jung) 등과 연결하여 재구성한다. 과정에서 데미우르고스는 단순한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실재의 형상을 결정하고 인식의 경계를 설정하는 권력의 형이상학적 인물로 읽히며, 이는 오늘날의 체제적 이념들과의 연결을 가능케 한다.

 

둘째, 데미우르고스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변형 양상을 여섯 가지 주요 구조로 분류하여 탐구한다: 민족주의, 전체주의, 과학주의, 자본주의 신화, 종교 근본주의, 정보주의. 이들은 서로 다른 사회적 제도와 문화적 형식 안에서 작동하지만, 공통적으로플레로마의 망각구조화된 무지라는 메커니즘을 공유하며, 인간을 내면적 앎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셋째, 플레로마 개념을 단순한 구원의 장소로 보지 않고, 존재의 본래적 충만함과 자기 내면에 대한 앎의 공간으로 해석함으로써, 탈데미우르고스적 인간상, 플레로마적 인간 존재론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니체의 초인(Zarathustra),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융의 자기(Self)와도 접속되며, 종국에는 존재에 대한 기억, 앎의 복원, 내면적 계시의 가능성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지주의 문헌의 신화적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통해 데미우르고스 개념의 본질을 규명한다. 둘째, 철학자들의 주요 개념플라톤의 형상론, 블라가의 인식 구조, 엘리아데의 성스러움 구조, 융의 무의식 분석, 하이데거의 존재론 비판적으로 호출하여, 현대 이데올로기의 유사신화적 기제를 논리적으로 해체한다. 셋째, 이데올로기 항목에 대해 실제 역사적 사례와 대표 인물, 텍스트, 사건, 담론 구조 등을 분석하여 논증의 구체성을 확보한다.

 

마지막으로, 논문은 하나의 회귀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현대 인간은 누구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어떤 실재를 진실이라 믿고 있는가? 질문은 데미우르고스적 구조의 해체를 넘어, 존재의 회복으로 이끄는 통로이며, 논문은 사유의 길을 추적하는 철학적 여정의 서곡이 것이다.

 

2. 데미우르고스란 무엇인가영지주의 신화와 존재론적 구분

 

2.1. 『요한의 비밀서』와 고대 영지주의 문헌의 핵심 인용

 

영지주의(Gnosis) 기원후 2세기경을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에 퍼졌던 일련의 종교적형이상학적 사유 체계이며, 기독교의 출현과 맞물려 플라톤주의와 오리엔트적 신비주의, 유대교적 묵시사상, 그리고 조로아스터적 이원론의 영향을 함께 받아 형성되었다. 중심에는 '(γνσις)'이라는 내면적 인식의 형식이 존재하며, 앎은 단순한 지식이나 계시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며, 실재와 나의 관계에 대한 내면적 현현이다. 사유의 가장 급진적인 구조는, 현상 세계를 창조한 신과 참된 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우주론에 있으며, 바로 지점에서 데미우르고스(Demiurgos) 개념이 핵심적으로 제시된다.

 

영지주의 문헌 중에서도 『요한의 비밀서(Apocryphon of John)』는 데미우르고스 개념을 가장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영지주의 우주론과 존재론의 구조를 압축적으로 제공한다. 문헌은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서 하나로, 1945 이집트에서 발견된 고대 콥트어 문서군의 일부이다. 문헌의 서두에서, 부활한 예수가 요한에게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본성을 계시하는 장면이 전개되며, 여기서 데미우르고스, 얄다바오트(Yaldabaoth) 창조 행위가 신화적으로 묘사된다.

 

요한은 플레로마(Pleroma), 신적 충만의 세계로부터 유출된 소피아(Sophia) 오만에서 얄다바오트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어머니의 빛을 일부 반사하였으나, 참된 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신이라 착각하며 말한다:

 

“나는 신이니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로빈슨, 2016, p. 121).

 

선언은 단지 신학적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부터의 권위, 존재의 왜곡, 진리의 은폐를 함축하는 영지주의의 전형적 구조이다. 얄다바오트는 무지 위에 물질 세계를 창조하며, 이를 통해 빛의 파편들을 가두고, 인류를 잊음 속에 놓이게 한다.

 

“그는 하늘과 , 물과 불을 창조했으나, 진리를 보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힘을 도둑질하여 그것으로 창조하였고, 자신이 근원이라 믿었다”(로빈슨, 2016, pp. 118–119).

 

세계는위조된 세계이며,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했던 동굴의 그림자처럼, 실재를 은폐하고 유사물로 구성된 구조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레로마의 질서를 모방하여 세상에 법과 계율, 통치자와 질서, 형상과 이름들을 부여하되, 모든 것은 진리의 반사이며, 존재의 가면이다.

 

영지주의 문헌들에서 데미우르고스는 단지 철학적 도식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에 대한 근원적 경고이다. 그는 무지 속에서 질서를 만들며, 플레로마를 모르기에 법과 형상으로 실재를 대체한다. 점에서 『요한의 비밀서』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존재와 인식에 대한 시적인 형이상학이라 있다. 인간은 질서 속에서 태어나고 살되,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플레로마의 흔적 참된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질서를 초월할 있다. 점에서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인식은 인간 자신이 무엇을 실재라 믿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반성이며, 반성을 통해서만 참된 (Gnosis) 도달할 있다.

 

『요한의 비밀서』의 이러한 세계관은 이후 플로티노스(Plotinos) 신플라톤주의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 이단 신학과 현대 심층심리학, 존재론적 비판 철학에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 개념은 고대 신화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이데올로기 비판의 비가시적 기준틀로 다시 소환될 있는 철학적 도구이다.

그는 스스로 신이라 믿는 무지한 존재, 형상을 진리로 착각하는 권력,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환상 구조, 현대 인간이 사는 질서 자체의 상징이다.

 

2.2. 참된 신과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론적 이원론

 

영지주의 우주론의 핵심은 단지 세계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서술이 아니라, 실재의 위계와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구별(Ontologische Differenzierung) 있다. 구별은 본질적으로 차원의 실재, 참된 (The One, ν)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나그함마디 문서에서는 얄다바오트로 불기기도 한다.) 사이의 존재론적 심연을 전제로 한다. 이는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유래된이데아와 모상 구별을 넘어서, 존재 자체의 질과 기원의 차이를 강조하는 급진적 이원론이다.

 

『요한의 비밀서』에 따르면, 참된 신은 이름 없고 형상 없으며, 말로는 설명할 없는 존재다. 그는 생각 이전의 근원적 일자(ν)이며,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충만(Pleroma) 자체로 존재한다.

 

“그분은 불가해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존재의 초월자이시다. 그분에게는 필요도, 결핍도, 이질성도 없다”(로빈슨, 2016, p. 115).

 

반면 데미우르고스는 이러한 근원을 알지 못한 , 고립된 존재로서 자신을 신이라 착각한다. 그는 소피아(Sophia) 일방적 유출로부터 태어난 왜곡된 생명이며, 진리의 모사로서 질서를 구성한다. 여기서 실재는 층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무한한 내재적 초월, 말할 없는 침묵의 신이며, 다른 하나는 형상과 , 명령과 구조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 데미우르고스이다. 존재론적 이중성은 현상 세계와 플레로마, 율법과 , 외재성과 내재성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원론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로 보고, 데미우르고스를 선의 구현자로 간주하며, 감각적 세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해석하였다(『티마이오스』). 그러나 영지주의는 데미우르고스를 실재의 왜곡자, 오만한 모사자, 존재를 은폐하는 무지의 기원으로 본다. 그는 실재의 매개자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착시의 조직자이다. 플레로마는 이로부터 철저히 단절되며, 단절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단층 구조이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와 유사한 구별을사유의 차단 구조(Structuri limitative ale gândirii)” 하며, 인간이 근원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인식 능력 자체가 무효화되는 구조를 설명하였다. 그는 말한다:

 

“참된 실재는 인간의 사고에 의해 결코 완전히 포착될 없으며, 인간의 모든 인식은 신성의 비가시적 검열(Cenzura transcendentă) 거친 결과물이다”(Blaga, 1931, p. 76).

 

, 데미우르고스적 인식은 검열된 질서에 머무는 인식이며, 참된 신은 오직 사유를 넘어선 존재의 방식, 영지(Gnosis)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이때 영지는 신비적 직관이나 계시라기보다, 존재와 실재에 대한 앎의 해방적 전회이다.

 

또한 데미우르고스의 심리적 구조를 자기(Self) 왜곡된 투사로 해석한다. 그는 『아이온』에서 말한다:

 

“인간의 자아는 자기의 미미한 반영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기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착각하며 자기 그림자와 동일시된다”(, 2011, p. 214).

 

이는 얄다바오트의 구조와 일치한다. 그는 무지 속에서 스스로를 신이라 선언하며, 존재의 중심을 외재화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 사회가 실재를 구조화하는 방식, 정치가 권위를 형성하는 방식 모두가 데미우르고스적 구조의 반복일 있으며, 구조는 참된 신의 실재를 가리고 대체하는 인식의 거울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왜곡을존재의 은폐(Verschlossenheit des Seins)” 지칭하며, 기술적 세계 안에서 존재는 실재로 드러나지 않고, 사용 가능한 대상(Zuhandenheit)으로 전락한다고 본다(하이데거, 2005). 데미우르고스는 바로 존재의 은폐를 보편적 질서로 제도화하는 자이며, 그는 인간에게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진리를 감춘다. 존재는 법과 형식, 규율과 통계로 환원되며, 플레로마는실재하지 않는 된다.

 

결론적으로, 참된 신과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론적 이원론은 실재와 형상, 기원과 구조, 침묵과 언어, 자기와 타자화된 사이의 철학적 간극을 형성하며, 간극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사유의 단층선이다. 데미우르고스를 아는 것은 그를 해체하기 위한 첫걸음이며, 인식은 다시금 실재의 충만함플레로마 기억하려는 존재의 노력으로 이끈다. 구별 없이는 진정한 (Gnosis) 시작되지 않는다. 참된 신은 법과 형상 너머에서 침묵하며, 침묵을 듣는 자만이 데미우르고스의 가면을 벗길 있다.

 

2.3. 보이는 세계와 참된 세계현실과 초월의 분리

 

영지주의의 존재론은 단순한 이원론적 신학을 넘어, 실재의 위장된 재현과 내면의 진실 사이의 깊은 단절을 사유한다. 『요한의 비밀서』를 비롯한 주요 영지주의 문헌들은 세상우리가현실이라 부르는 세계 플레로마적 실재의 왜곡이자 모사로 간주하며, 보이는 세계와 참된 세계 사이에 놓인 형이상학적 장막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려 한다. 분리는 인식론적 도식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 자체에 대한 비판적 계시이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데미우르고스, 얄다바오트는 어머니 소피아의 빛을 훔쳐 세계를 창조하지만, 창조는 진리의 표현이 아니라 진리의 은폐를 위한 질서의 위조이다. 그는 세계에 하늘과 , 불과 , 동물과 인간의 육체를 부여하지만, 구성 원리는 무지와 오만이며, 질서는 플레로마의 반영이 아니라 반反형상(antiform)이다(로빈슨, 2016, pp. 118–119). 이로써 인간은현실이라 불리는 감각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서 태어나지만, 존재의 심연은 플레로마라는 비가시적 공간에 묶여 있다.

 

대립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서술한동굴의 우화 사상적으로 깊은 평행성을 지닌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동굴 안에 묶여 불빛 앞의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실재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실재는 동굴 밖에 있으며, 진리는 그것으로 나아가는 고통스러운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접촉 가능하다. 이는 바로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Gnosis, 존재의 기억으로서의 앎과 동일한 방향성을 가진다.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재라는 역설은 플레로마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 구조는 더욱 복잡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인간의 인식 구조가형상적 복제물(imagini)’ 매몰된다고 지적하며,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것들의 축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지각하는 모든 실재는 일종의 orbi simbolici(상징적 맹목) 결과이며, 맹목이야말로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의 핵심이라 진단한다(Blaga, 1931, p. 91). , 우리는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사회적·언어적 재현을 보고 있으며, 재현이야말로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에게 부여한형상 총체인 것이다.

 

역시 무의식의 작동 구조를 통해 이러한 세계의 이중성을 설명한다. 그는 자아(ego) 현실 세계와 동일시될수록, 자기(Self) 더욱 깊은 무의식 속에 침잠하며, 결국 인간은보이는 자아 극장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2011, p. 227). 이는 존재의 본질이 사라지고, 실재는경험의 표면에서만 발생하는 현대적 위기이며, 이는 데미우르고스의 지배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기를존재의 은폐(Verschlossenheit des Seins)” 명명하면서, 존재는 이상 스스로 드러나지 않고, 인간은 실재에 대한 질문 자체를 상실한 상태로 전락한다고 진단한다(하이데거, 2005). 기술적 세계와 상품화된 현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재구성된 인간 인식은 모두현실이라는 보이는 세계를 강화하면서, 초월의 가능성, 플레로마의 기호들을 지워나간다.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 이상 보일 없게 이며, 사태는 철학적 실재의 붕괴를 뜻한다.

 

유발 하라리 역시 현대 정보주의 사회가 실재를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구조 환원시키며, 인간을 이상 내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데이터 흐름의 경로 이해한다고 지적한다(하라리, 2017, p. 319). 이로써 보이는 , 통계, 수치, 알고리즘, 행동 데이터는 절대화되고, 보이지 않는 , , 직관, 상징, 무의식, 영혼은 제거된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세계가 참된 세계를 점령한 데미우르고스적 현실이다.

 

결국, 보이는 세계와 참된 세계의 분리는 단지 철학적 구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간의 실질적 태도와 자기 이해의 양식에 대한 근본적 구분이다. 보이는 세계는 데미우르고스가 구축한 질서이며, 세계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규정하려 하지만, 그것은 앎의 종착지가 아니라 망각의 기계이다. 반면, 참된 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며, 그것은 실재의 잔향으로서, 존재의 목소리로서 인간의 내면에 들려온다. 목소리를 들을 있는 자만이, 플레로마의 존재론을 기억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의 진리 향해 나아갈 있다.

 

3. 데미우르고스를 따르는 삶의 구조적 특징

 

3.1. 물질 숭배와 권력에 대한 집착

 

데미우르고스적 질서가 창조한 세계는 단지 형상과 법의 체계로서가 아니라, 욕망과 집착, 환상과 동경의 구조로 인간 존재를 길들인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얄다바오트는 플레로마로부터 단절된 물질 세계를 창조하며, 인간 안에 빛의 흔적영혼의 씨앗 가두기 위해 수많은 통치자들(Archons) 권력적 질서를 만들어낸다(로빈슨, 2016, p. 119). 이들은 형상과 감각, 육체와 , 쾌락과 권위를 통해 인간을 세계 안에 귀속시키며, 인간은 안에서사는것이 아니라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물질의 절대화와 권력의 형이상학화로 특징지어진다. 물질은 단지 삶의 기반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자 목표로 상승하며, 자체가 신화화된다. 세계에서 인간은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며, 많이 소유하고 통제할수록 완전한 존재라고 믿는다. 데미우르고스는 세계를 구성할 본질에 진리를 주입하지 않고, 모사된 형상과 외형적 충만으로 그것을 위장하였다.

 

“그는 없이 창조하였으며, 모방으로 질서를 구성하였고, 물질과 육체를 신성으로 가장하였다”(로빈슨, 2016, p. 120).

 

이는 고대 후기 영지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욕망의 질서' 세계이며, 참된 실재의 결핍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소유의 구조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데미우르고스적 형식의 철저한 반복이다. 인간은 자신을 소유물, 소득, 공간, 정보, 명성 등의 외적 기준으로 규정하며, 내면의 플레로마적 기호자각, 침묵, 기억, 제거하고, 자리에 축적과 과시의 상징체계를 설치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와 같은 현실을존재의 외화 구조(structura de exteriorizare a ființei) 설명하며, 인간이 내면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세계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심리적 구조가 형성된다고 본다(Blaga, 1931, p. 88). 이러한 구조는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세계의 철학적 기반과 일치한다. 실재는 내면에 있지 않고, 외부의 질서 속에 위치한다는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소유와 권력의 재확인 추구하게 만든다.

 

역시 『아이온』에서 인간의 권력 욕망을 자아의 과도한 팽창과 그림자의 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자아가 자기(Self) 억압할수록 외부로의 권력 투사가 증가하며, 이는 독재자, 국가 권력, 영웅 신화 등의 형태로 제도화된다고 보았다(, 2011, p. 198). 데미우르고스적 삶은 바로 이러한 자아의 병적 팽창을 집단적으로 제도화한 결과이며, 인간은 자유를 욕망하면서도 자유를 통제의 다른 형식으로 대체한다.

 

현대의 정치권력과 대중문화 영웅주의, 시장의 무한 경쟁, 이미지 기반의 우상화된 스타 시스템 등은 모두통제된 열망의 극장이라 있으며, 이는 플레로마의 비가시성을 가리는 기제다. 이때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적 구조 속에서 훈육된 존재, 욕망하고 복종하며, 소유하고 자멸하는 존재가 된다. 권력은 단지 통치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형이상학적 위계로 작동하며, 인간의 자아는 위계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면서 점점 내면에서 이탈한다.

 

이로써 데미우르고스를 따르는 삶은 소유와 통제를 향한 믿음, 외형적 완전성에 대한 집착, 존재의 외재화를 통한 자아의 소외를 축으로 형성된다. 물질은 실재가 아니며, 권력은 신성이 아니나, 인간은 그것들을 통해살고 있다 믿는다. 영지주의는 바로 믿음을 해체하는 철학이며, 인간이 플레로마의 침묵을 기억하는 순간, 소유는 의미를 잃고, 권력은 벗겨진다. 순간 데미우르고스의 질서는 균열되고, 진정한 존재의 회복 (Gnosis) ― 시작된다.

 

3.2. 법과 규칙의 절대화질서의 허구화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세계의 하나의 핵심 구조는 법과 규칙의 절대화, 질서라는 이름으로 존재 전체를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단지 사회적 안정을 위한 도덕이나 법률의 정당화가 아니라, 존재의 실재를 제도화된 형식과 명령으로 대체하려는 권력적 욕망의 형이상학적 구조이다. 『요한의 비밀서』는 얄다바오트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아르콘들(archons) 창조하고, 이들이 인간을 법과 형상으로 통제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묘사한다.

 

“그는 그들과 함께 천국을 조직하고 법과 율령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하였다. 그의 율령은 진리에 기반하지 않았다”(로빈슨, 2016, p. 120).

 

문장은질서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진리에 닿지 못한 허위적 구성물일 있음을 보여준다. 데미우르고스의 질서는 본래의 선이나 정의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무지와 자기 신격화의 산물이며, 법은 플레로마의 계시가 아니라, 플레로마의 은폐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의 종교적 율법주의뿐 아니라, 현대의 국가권력, 학문체계, 기업 문화 제도 전반에서 반복되며, 중심에는법을 따를수록 선하다 윤리적 기만이 작동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법과 규칙이 존재의 의미를 전제하는 대신, 존재 자체를 은폐하고 특정한 존재 양식만을 정식화하는 기술적 규범으로 전락한다고 지적하였다(하이데거, 1998). 이때질서 인간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가능성을 폐쇄하는 기능을 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구조를 형식의 폭력(forta a formelor)이라 부르며, 인간이 실재를 형식적으로 재단하려는 순간, 존재는 기호로서 제도화되며, 진리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된다고 분석하였다(Blaga, 1931, p. 122). 이러한 구조 속에서 법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고 억압하는 상징 체계로 작동한다. , 데미우르고스가 말하는 존재의 내면적 진리를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시 『아이온』에서, 법과 규칙의 절대화가 자아의 불안을 덮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라고 분석하였다. 그는 말한다:

 

“도덕적 규범을 절대화하는 사회는 무의식적 죄책감을 사회적 통제로 전치한 결과이며, 이는 내면의 자기와의 분열을 심화시킨다”(, 2011, p. 198).

 

법은 곧바로 양심이 아니며, 규칙은 반드시 진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은 종종 내면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자율적 앎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사용된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데미우르고스가 빛의 파편을 법의 형상 속에 가두어,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기억하지 못하게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현대 사회에 있어 이러한 구조는 더더욱 세련되게 작동한다. 윤리 교과서, 정책 매뉴얼, 사법 체계, 종교적 교리, 과학적 방법론, 정보 보안 규정 수많은 형식의규칙들은 모두옳음진리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질서 유지와 통제 가능성 확보를 위한 도구에 불과함을 자주 드러낸다. 구조 안에서 인간은 규칙을 따름으로써 안도하지만, 동시에 규칙에 의해 존재의 다양성과 내면의 복잡성은 제거된다.

 

결국, 데미우르고스를 따르는 삶이란, 법과 질서를 신성시하고, 존재를 구조화된 코드로 해석하려는 욕망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삶이다. 삶은 플레로마의 다성성과 개방성을 폐쇄하고, 인간을 규칙화된 패턴의 주체로 전락시킨다. 영지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법적 형상화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목소리를 회복하려 한다. 플레로마의 앎은 법의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침묵 속에서 발생하는 앎이다. 앎은 따르지 않으며, 기억하고 통과한다.

앎은 무법(無法) 자유가 아니라, 초법(超法) 진리에 이르는 존재론적 전복이다.

 

4. 데미우르고스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변형이데올로기의 유사신화적 구조

 

영지주의의 우주론은 존재의 이중성을 전제한다. 세계는 참된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인간은 타락한 세계 속에서 오직’(γνσις, gnosis) 통해서만 진정한 실재에 도달할 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근원적 인식이며, 허구적 구조를 구성하는 권위,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의 본질을 직면하는 영혼의 투쟁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여기서 단지 신화적 인물을 넘어, 실재를 구성하고 조작하는 모든 권력 구조의 원형으로 작용한다. 현대 이데올로기 속에서 데미우르고스는 가면을 바꿔 쓰며, 다양한 문화적·정치적·기술적 형식으로 재현된다. 그것은 물질적 실재와 감각적 이미지에 권위를 부여하고,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를 외면한 하나의가상적 전체속에 인간을 감금한다.

 

이데올로기란,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를 좇는다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이데올로기는 존재론적 환상의 체계이며, 플레로마적 진실에서 분리된 혼돈의 세계를 정당화하는 신화적 내러티브의 현대적 재구성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이상 하늘 위에서세계를 만든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오늘날 뉴스의 담론 속에, 국가적 이념의 깃발 속에, 과학적 절대주의의 명제들 속에, 혹은 경제적 자율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데이터 알고리즘 속에 은닉되어 있다. 실재의 조작자는 이상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주체 내면에내면화된 권력’(internalized authority)으로 거주하며, 인간의 인식 구조 자체를 장악한다.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힘은 그것이 단순히 억압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구성하고 생산하는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구성적 권력(con-stitutive power) 정점에 있으며, 그가 만드는가짜 실재 우리의 일상, 지식, 감정, 욕망에까지 침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정치적 허위나 거짓 이념으로 환원할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창조 행위이며, 세계를 설명하는 대신 구성하고, 실재를 반영하는 대신 규정한다. 블라가는 이러한 구조를문화적 무의식의 창조력’(forța creatoare a inconștientului cultural)이라 불렀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심층 구조 속에 무의식적 신화 작용이 있으며, 인간은 신화의 이야기 안에서 자기 존재를 이해한다고 보았다(Blaga, 1931, p. 68). 특히 데미우르고스적 구조는 혼돈을 질서로 가장하며, 삶의 복잡성을 단순한 이항 논리로 정리하려 든다. 적과 동지, 이성국가와 이단자, 진보와 퇴보, 안전과 위협, 순수와 타락이라는 허위적 대립 구도는 모두 데미우르고스의분할의 언어에서 비롯된다. 언어는 현실을 이념에 맞게 재구성하며, 인간의 앎을 억제하고 심연을 외면하게 만든다.

 

엘리아데는 현대 사회가종교 없는 종교적 구조’(religio sine religione) 변형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인간은 과학적이라고 자부하는 기술 체계 속에서도 여전히 상징과 의례를 반복하며, 신성한 질서로서의 이데올로기를 경배한다(Eliade, 1957). 이때 데미우르고스는하이퍼실재’(hyperreality) 구성하는 매개체로서 작동한다. 보드리야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데올로기는 이상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보다 현실적인 시뮬라크르(simulacrum) 생산함으로써 인간을기표의 미로속에 유폐시킨다. 인간은 이제 이상 자연적 실재를 경험하지 못하며, 오직 이데올로기적 매개를 통해 세계에 접근한다. 점에서 현대 이데올로기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속성과 완벽히 일치한다. 그는 가짜 세계를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전부 믿게 만든다.

 

이러한 가짜 실재는플라톤적 동굴 그림자 극장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극장의 무대 세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 안에서 행동하고 선택하고 고뇌한다. 광고 이미지 속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조작되고, 국가 담론 속에서 정의는 편향되며, 정보 알고리즘 속에서 진리는 소비자 맞춤형으로 분절된다. 여기에 인간은 이상의미를 창조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를 공급받는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한다. 이때 인간의 영혼은 블라가가 말한도그마적 에온’(Eonul dogmatic) 체계 속에 갇히며(Blaga, 1931), 앎은 생명력을 잃고 체계의 재생산 기제로 전락한다. 융이 지적했듯, 이데올로기는 원형(archetypal) 부패이며, 인간 내면의 신성한 힘을 외부 권위에 양도하도록 만든다(Jung, 1964, p. 102).

 

과학의 이름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권리의 이름으로 설계된 새로운 데미우르고스는 인간의 자율성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감각을 제거한다. 플레로마로부터의 단절, 신적 실재와의 단절은영혼의 망각 초래하며, 망각은 데미우르고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한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는 단지 타락한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방향을 왜곡시키는 항구적 유혹이다. 진리를 말하는 자처럼 등장하되, 진리를 은폐하며, 자유를 외치는 자처럼 말하되, 자유를 구조화한다.

 

현대 이데올로기의 데미우르고스는 보편적 이성, 중립적 과학, 기술적 합리성, 도덕적 규범이라는 형식으로 위장되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광기, 음모, 비과학, 반사회적 존재로 낙인찍힌다. 이데올로기의 가장 위험한 형태는 그것이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있다’(Zizek, 1989). 이러한 자가소멸적 형식의 권위는 바로 영지주의가 지적한 데미우르고스의 본질, 자신이 신이라는 착각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무지 속에서 창조하고, 무지를 유지하기 위해 신성을 가장한다. 그는 진리를 제공하는 대신 질문을 봉쇄하고, 존재를 열어주는 대신 질서에 봉합한다.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없다. 이데올로기적 데미우르고스의 세계에서, 인간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인간은 여전히 플레로마로부터의 불꽃, 영혼의 파편을 간직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조를 해체할 있는가? 질문은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신화적 상상력의 복원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에 대한 비판은 단지 정치적 급진주의나 사회 이론의 확장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신화적·영적 항거이며, 철학의 가장 오래된 과제‘무엇이 진실인가?’ ― 다시 물으려는 시도이다.

 

4.1. 민족주의: 20세기 독재 정권의 구조와 신성화

 

민족주의(nationalism) 자체로 근대국가 형성의 원동력이자, 역사적 정체성의 정치적 집약체로 이해될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주의는 단지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하나의 거짓된 신화적 구조 속에 가두는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의 발현으로 분석될 있다. 20세기 초엽의 유럽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급진적 폭발을 목격한 시대였다. 그것은 단순한 공동체 의식의 고양이 아니라, 전체적 실재를 구성하는 데미우르고스적 창세 내러티브로 작동하였다. 특히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민족주의는 인간 존재를 신화적 원형 속에 고정시키고, 그를 하나의민족 신체 부속으로 환원함으로써, 플레로마적 존재 자유를 봉쇄하는 체계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러한 민족 중심적 이념 구조를도그마적 에온’(Eonul dogmatic) 집단적 변종으로 보았다. 그는 민족주의가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며, 신화가 인간의 인식 구조를 결정짓는 시대적 형식을 형성한다고 보았다(Blaga, 1931, p. 52). 특히 그는 민족주의가 상징적 상상력의 유기적 생성을 억제하고, 모든 의미를민족 공동체의 신성화된 내러티브 종속시킴으로써, 존재의 본질적 개방성을 차단한다고 비판한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질서는 고유하고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을 억제하며, 자율적 인식을 지닌 인격 주체 대신, 의례적 반복과 상징적 동일성 속에 묶인 신화적 피조물을 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민족주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데미우르고스가 구성한 가짜 세계(plēnōma)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요한의 비밀서』에 등장하는 얄다바오트(Yaldabaoth)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이라 착각하며, 세상의 중심을 자처한다. 그는 자신이 아닌 상위 실재(하나, The One) 존재를 알지 못하고, 무지를 신성으로 오인한다. 민족주의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보편적 존재 질서나 인간 내면의 플레로마적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 특정 언어, 혈통, 문화의 우위를 절대화하고, 이를 위하여 하나의 구조적 신화를 구성한다. 신화는 과거의 황금기, 순수한 민족혼, 위협받는 국경과 같은 신화적 요소들을 조작하여, 현재를 위기와 구원의 드라마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드라마 구조는 파시즘과 나치즘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제국의 로마적 원형을 소환하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아리안 신화를 활용하여, 국가를 하나의 성스러운 공동체로 재신성화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지리적, 역사적 실체를 넘어서서, 민족 자체를 하나의 신적 실재로 재현한다. 민족은 혈연과 땅을 넘어선 존재론적 단위이며, 인간은 안에서만 의미를 부여받는부분의 전체 환원된다. 이때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은나는 신이다 아니라, ‘민족이 신이다라는 새로운 위장을 통해 실현된다. 신성화된 민족은 대체로 외부의 , 내부의 배신자, 이질적 존재들을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순수성과 영속성을 강화하며, 이로써 인간 개별성은 무화되고 집단적 동일성의 심연으로 사라진다.

 

이러한 동일화 과정은 구스타프 융이 말한집단적 그림자’(collective shadow) 투사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융에 따르면,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무의식적 부정성과 어두운 측면을 외부의 타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스스로의 순수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Jung, 1959, p. 144).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는 이러한 투사를 구조화하며, 타자를 제거하는 것을 자기 정체성의 확립으로 전환시킨다. 이때 국가는 정화의 제단이 되며, 권력자는 제사장이자 창조자가 된다. 데미우르고스는 새로운 민족 신화를 통해 재구성되며, 그는 인간에게 참된 자유나 내적 자각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충성과 희생만을 요구한다.

 

더욱이, 민족주의는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 체계를 조직하는 신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엘리아데는 현대 정치 이념이종교의 세속화혹은종교의 정치화 통해, 신화를 대신한다고 보았다(Eliade, 1957). 국가의 영토는 신성한 공간이 되고, 국경은 우주론적 질서의 경계로 작동하며, 국가는 하나의 종교 기관처럼 작동한다. 국기의 게양, 국경일의 제의적 반복, 순국선열의 숭배는 모두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재현하는 의례이며, 인간은 의례적 반복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반복은 인간 존재의 내면화를 차단하고, 플레로마적 성찰을 외면하게 만든다. 인간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신화에 동화되고,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초월적 진동을 억압한다.

 

20세기 후반 이후, 이러한 민족주의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였으나, 데미우르고스적 구조는 여전히 지속된다. 포스트식민 국가들에서, 혹은 분단과 내전을 경험한 지역들에서 민족주의는 치유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는 신화적 고착으로 작용한다. 탈식민적 정체성 회복의 이름으로 민족 담론이 강화될 , 그것은 때로 새로운 폭력의 씨앗이 되며, 타자에 대한 배제와 동질화의 강요를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진정한 존재 회복이나 인식의 개방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적 재봉합으로 귀결된다.

 

결국 민족주의가 구성하는 신화는하나의 세계 약속하지만, 사실은하나뿐인 세계 강요한다. 다양한 실존과 다층적 정체성은 하나의 민족서사로 통합되며, 복수의 앎과 경험은 단일한 역사의 언어로 번역된다. 데미우르고스는 번역의 과정 속에서 실재를 억제하고, 세계의 다성성을 단일한 질서로 전환한다. 결과 인간은 이상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받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민족주의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환상이며, 데미우르고스적 기만이다.

 

이러한 환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민족을 하나의상징적 구성으로 해체하고, 구성 너머에 있는 인간 존재의 플레로마적 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 민족은 자체로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려는 하나의 역사적 양식이며, 양식은 언제나 초월될 있다. 영지주의적 사유는 인간이 양식에 갇히지 않고, 무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로 그때, 데미우르고스적 민족주의는 이상 신화적 구속력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며, 인간은 신화적 장막을 뚫고 존재의 본래성과 재회하게 된다.

 

4.2. 전체주의: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의 데미우르고스적 성격

 

전체주의는 단지 정치 체제의 유형이나 권력의 과잉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구조적 변형을 목표로 하는 궁극적 프로젝트이며, 실재의 구성 권한을 독점하려는 데미우르고스적 기획이다. 특히 20세기의 전체주의스탈린주의와 나치즘 단순히 억압적 권력 장치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의미론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유사신화적 메타체계였다. 체계는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재조립하며, 실재를 하나의 정치-신화적 언어로 완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근대 데미우르고스의 현현이며, 존재를 해체하는 대신전적으로 구성하는 신화의 장치로 작동하였다.

 

영지주의적 전통에서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 참된 신이 아니다. 그는 플레로마의 빛을 알지 못한 , 자신의 무지를 전능으로 오인하고 세계를 만든 피조물이다. 그는 혼돈을 질서로 가장하며, 자신의 법과 구조를 실재의 최종 근거라 선언한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묘사되듯이, 데미우르고스 얄다바오트는나는 신이요, 외에 다른 이는 없다 외치지만, 말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절규이다(Apocryphon of John, ca. 2nd c.). 전체주의 권력자들은 바로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목소리를 반복한다. 그들은 자신이 역사의 정점, 진리의 대변자, 인간 진보의 기수라고 자임하면서, 존재의 다성성과 영혼의 복수성을 억압한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역사 인식을 철저히 체계화하면서, 인식을 하나의 신화적 필연성으로 정전화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상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을 해석하는 유일한 계시로 작용하게 되었고, 당은 계시의 관리자이며, 스탈린은 계시의 화신이 되었다. 과정에서 인간은 계급 투쟁이라는 신화 속에서 구속되었으며, 존재의 의미는 노동과 충성, 그리고 당에 대한 복종으로 환원되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인간 존재론의 재설계였다. 당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였으며, 언어와 역사, 기억마저 재조직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탈린주의는 하나의 데미우르고스적 창조 행위였다. 세계는 이상 자율적 실재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발명된 세계였다.

 

한편, 나치즘은 생물학적 신화를 정치 질서로 재현한 극단적 사례였다. 히틀러는 민족과 인종의 개념을 존재론적 단위로 상승시키고, 아리안 종족을 세계의 중심으로 재정립하였다. 여기서 권력은 단지 법적 강제력이 아니라, 자연과 진리, 우주 질서를 대변하는영적 권위 작동하였다. 나치는 과학적 언어, 신화적 상상력, 종교적 의례, 국가기호, 대중매체를 총동원하여, 하나의 전일적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플레로마의 빛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구조화된, ‘거짓 전체 세계였다. 세계 안에서 인간은 개인적 성찰이나 영적 자유를 박탈당한 , 생물학적 유형성과 집단적 동일성 속에 감금되었다. 인간은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순혈 민족기계 부속품이었다.

 

이러한 전체주의 체계는 루치안 블라가가 말한형이상학적 봉쇄’(blocaj metafizic) 구체적 구현이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전체성이란 인간 정신의 개방성을 닫아버리는존재의 도그마화이며, 문화적 창조력의 근원적 단절이라고 보았다(Blaga, 1931, p. 112). 블라가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인식 체계가 인간을 무의식적 반복 속에 가두고, 플레로마의 자유로운 상징 구조를 파괴한다고 지적하였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상징을 해석하지 않고 복제하며, 의미를 생산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때 인간 정신은 신화의 생성자로서가 아니라 신화의 산물로 전락한다.

 

전체주의의 핵심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화적 재편성이다. 권력자는 데미우르고스처럼 세계를 구성하고, 인간을 정의하며, 의미를 생산한다. 진리는 대화나 검증이 아니라 권위에 의해 주어지며, 시간은 열려 있는 흐름이 아니라 폐쇄된 예정이다. 이러한 시간 인식은 플레로마적 구원의 가능성을 제거하며, 모든 앎을현재 권력의 언어 정렬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반복 구조를거짓된 영원회귀라고 비판한다. 그는 전체주의가 신화의 형식을 도용하되, 내면의 초월성을 제거한 , 신화의 골격만을 도그마로 재활용한다고 보았다(Eliade, 1954). 다시 말해, 전체주의의 신화는 창조가 없는 창조이며, 영혼이 없는 의례이다.

 

융은 전체주의를 무의식의 집단적 압도, 집단 무의식이 개인 인격을 완전히 흡수한 상태로 보았다. 그는 특히 나치즘이 고대 게르만 원형(archetype) 어두운 재현이라 보았으며, 전체주의는 심리적 투사 구조를 제도화함으로써, 대중을 자발적 노예로 만드는신화의 폭력화라고 분석하였다(Jung, 1959, p. 210). 데미우르고스는 바로 지점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는 스스로를 창조자라 주장하면서, 실은 무의식의 혼돈을 정치적 구조로 치환한다. 그의 세계는 진리를 구성하지 않으며, 다만 진리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다.

 

전체주의에서 나타나는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의 다른 측면은 언어의 해체와 재구성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것처럼, 전체주의 체계는 언어를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존재 인식의 도구로 간주한다. ‘뉴스피크 사고를 제한하고 사유를 삭제하는 언어로, 세계를 통제하려는 데미우르고스적 욕망의 산물이다.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나치 독일 모두 이러한 언어 권력을 체계화하였으며, 결과 인간은 세계를 언어를 통해 재현하는 대신, 언어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감각의 기만’, 얄다바오트가 만든 허상 세계와 정확히 상응한다.

 

결국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극한 형식이며, 데미우르고스적 신화를 정치적 현실로 구현한 사례이다. 그것은 진리를 제공하지 않고, 진리의 필요 자체를 제거하며, 인간을 창조하지 않고, 창조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세계 안에서 인간은 플레로마를 망각하고, 존재의 무게를 체험하지 못하며, 내면의 심연을 봉인당한다. 이때 진정한 해방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존재론적기억의 회복이며, 인간이 다시금 자기 안의 , 알레테이아(λήθεια)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지점에서 영지주의의 메시지는 철학의 심연으로 되돌아온다. 데미우르고스를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를 넘어설 있다.

 

4.3. 과학주의: 과학 만능주의와 영성 부정, 영지주의적 인식 거부

 

근대 이후 과학(scientia) 존재에 대한 진리 탐구의 유력한 형식으로 부상하였다. 이성적 설명과 경험적 검증을 기반으로 과학은 신화와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인간 중심의 인식론을 정초하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과학이 절대화될 , 과학 자체가 세계의 유일한 해석 원리로 자처하고, 인식형태를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로 전환될 ,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scientism) 마주하게 된다. 과학주의는 이상 탐구의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존재를 축소시키고 인식의 다원성을 제거하는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때 과학은 지식의 이름을 빌려 존재의 구조를 폐쇄시키며, 인간 내면의 영적 차원을 무효화한다. 과학주의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무지의 권력, 얄다바오트적 어둠의 메커니즘을 재현한다.

 

영지주의적 사유는 존재의 층위를 다양하게 본다. 세계는 단지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에온들(Eons) 구성된 다차원의 실재이며, 인간은 다층적 실재에 연결된심연의 존재’(βάθος, bathos)이다. 이때 진정한 (gnosis) 감각적 표층을 넘어, 플레로마의 진동에 도달하는 내적 계시에 가깝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실재를 감각 가능한 것으로만 한정하고, 실험 가능한 것만을 존재로 승인하며, 인과성과 양적 분석만을 인식의 조건으로 삼는다. 결과, 존재는 계산 가능한 것으로만 축소되고, 진리는 측정 가능한 것으로만 환원된다.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성,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비합리적 요소로 분류되어 인식의 영역 밖으로 추방된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이러한 환원을 '탈신성화된 세계' 비판하였다. 그는 근대 과학이 세계의 상징구조를 제거하고, 실재를 평면화시켰다고 보았다. 세계는 이상 계시의 장이 아니라, 작동 가능한 기계가 되며, 인간은 상징을 해석하는 존재에서 기호를 소비하는 존재로 전락한다(Eliade, 1957). 엘리아데는 과학주의가 인간 내면의 초월성을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신비를 말살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이러한 환원이 결국 존재의빈곤 초래하며, 인간 정신을 신화의 복원 욕구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과학주의는 신화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신화를 대체로 도입함으로써 데미우르고스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적 과학주의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진리의 의지'(Wille zur Wahrheit) 반전시킨다. 니체는 진리 탐구 자체가 하나의 의지이며, 삶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진리의 의지를 외면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리를 내세우며 존재의 활력을 제거한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지적하듯, “인식은 충동과 본능의 이면이다”(Nietzsche, 1886, §3). 과학주의는 이러한 본능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세계를살아 있는 생명 아닌, ‘죽은 구조 환원시킨다. 이때 인간은 존재를 창조하거나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수집하고 분류하는 기계로 기능하게 된다.

 

구스타프 또한 과학주의적 인식이 인간 무의식의 실재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집단무의식과 원형(archetype) 세계가 인류 정신의 근원임을 강조하며, 과학이 이를실재하지 않는 으로 치부할 , 인간 정신은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고 보았다(Jung, 1959, p. 73). 융에 따르면, 과학주의는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보지 않고, 신경계의 화학 반응이나 유전자의 결과물로만 설명함으로써, 영혼의 주체성을 제거한다. 이때 인간은 이상 자기실현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통계적 표본으로 분석된다. 과학주의는 데미우르고스처럼 세계의진실 말하지만, 진실은 플레로마와는 무관한, 허상과 구조의 산물이다.

 

블라가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주의는폐쇄된 인식 체계’(sistem închis de cunoaștere)이며, 파괴적 사고(gândire distructivă) 반대극을 형성한다. 블라가는 인간 인식의 창조적 힘은 미지와의 긴장에서 발생한다고 보았고, 모든 탐구는 '미궁의 열림' 속에서 진정한 사유가 가능하다고 하였다(Blaga, 1931, p. 97). 그러나 과학주의는 미지 자체를 부정하고, 탐구 대신 측정, 사유 대신 분석으로 대체하며, 존재를 닫힌 체계로 봉합한다. 이때 세계는 해석의 장이 아니라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되고, 인간은 존재의 수신자가 아니라 시스템의 운영자가 된다.

 

과학주의는 신화성의 불가시성을 통해 더욱 강력한 데미우르고스적 권위를 획득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를비이데올로기 위장하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했듯, 가장 위험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Zizek, 1989). 과학주의는 구조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것은 진실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실상은 인식과 존재의 특정 형식을 절대화하며, 인식 가능성을 비합리로 추방한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 직관, 영적 경험은 과학주의 안에서는 병리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거나, 통계로 무력화되며, 내면의 진실은비과학이라는 이유로 침묵당한다.

 

이때 우리는 과학주의가 하나의 종교적 구조를 내면화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신념 체계이며, 성직자의 역할을 과학자가, 교리를 학술지가, 구원을 치료와 기술이 대체한다. 과학주의는 증명의 언어로 예언을 수행하며, 기술적 해결을 통해 초월의 욕망을 대리한다. 과정에서 인간은 영지주의적 구원의 길을 잃고, 얄다바오트적 질서 속에 내면을 봉인당한다. 플레로마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의 심연은 측정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삭제된다. 이처럼 과학주의는존재의 삭제 통해데이터의 제국 세운다.

 

결국, 영지주의는 과학주의에 맞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영지주의는 감각의 세계를 거짓이라 단정하지만, 그것을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너머의 실재를 기억하도록 요구한다. 실재는 계량할 없고, 예측할 없으며, 오직 내면의 앎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 과학주의는 이러한 앎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모든 진리를 외부로부터의 정보로 대체한다. 그러나 진정한 gnosis 언제나 주체적이며, 살아 있는 존재의 깊이에서 발생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세계를 구성하지만, 구원은 바깥에서 오며, 구원은 존재의 회복을 요구한다.

 

따라서 과학주의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형식적 설명일 있으나, 그것이 유일한 진리의 형식일 수는 없다. 인간은 실험실의 대상이 아니라 우주의 해석자이며, 존재의 기호를 해독하는 신비로운 주체이다. 영지주의의 빛은 진리를 회복하라고 말하며, 과학주의적 데미우르고스의 구조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다시금 존재의 다차원성과 영성의 충만함을 기억할 있다. 이것이 앎의 회복이며, 존재의 해방이다.

 

4.4. 자본주의 신화: 소비주의 광고의 플라톤적 그림자 극장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적 체제나 생산 양식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 인식과 존재 양식 자체를 재편하는 심층적 이데올로기 체계로 작동한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생존의 수단이나 교환의 메커니즘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적 우주(cultural cosmos) 창출한다. 우주는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동시에, 욕망을 조작하고 환상을 조형하는 유사신화적 구조를 내포하며, 그것은 인간의 자율적 앎과 존재의 내면화를 가로막는데미우르고스적체계로 전환된다. 체계의 중심에는광고 있다. 광고는 자본주의 신화의 전달체이며, 인간 감각과 상상을 동원하여 실재의 환상을 조직하는 현대판 그림자 연출자다. 결과, 우리는 이상 세계 자체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이미지와 상징을 소비함으로써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자본주의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경고한동굴의 그림자 극장으로 전락한다.

 

플라톤의 동굴 은유는 감각 세계의 허상성과 철학적 앎의 구조를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동굴 인간은 벽면에 투사된 그림자를 세계의 실체로 믿고, 그것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 환상을 실재로 착각한다(Plato, Republic, Book VII).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적 (epistēmē) 그림자에서 벗어나, 참된 이데아(idea) 직면하는 정신의 전환이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술적 재생산과 시각 매체의 발달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매혹적인 형태로 귀환하였다. 광고는 귀환의 매개이며, 그것은 이미지와 기호를 통해 실재를 대체하고, 욕망을 구성하며, 인간의 내면을시선의 포로 만든다.

 

이러한 구조를 가장 예리하게 해석한 이론가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이다. 그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시뮬라크르’(simulacrum) 지배 하에 있는 사회로 규정하며, 현실이 이상 실재(reality) 일치하지 않고, 기표(signifier) 자율적 운동에 의해 대체된다고 주장한다(Baudrillard, 1981). 이때 광고는 물건을 팔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코드 체계이며, 상품은 기능을 넘어 상징으로 작동하게 된다. 광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게 만들며, 실재보다 실재적인하이퍼리얼리티 조직한다.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티는 데미우르고스적 환상의 재구성이다. 소비자는 이상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지 않고, 자본이 제공한 기호에 따라 욕망하도록 길들여진다. 결과, 인간은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이미지 소비의 객체가 된다.

 

과정은 루치안 블라가가문화의 신화화’(mitizarea culturii) 부른 구조와 깊게 상응한다. 블라가는 현대 문화가 자율적 상징 창출을 포기하고, 반복 가능한 이미지의 소비로 퇴행한다고 진단했다(Blaga, 1931, p. 122). 그에 따르면, 진정한 문화란무한한 미지에 대한 창조적 응답이며, 상징의 다층성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광고 중심의 소비주의 문화는 상징의 다층성을 제거하고, 단일한 기호로 환원시킨다. 이때자동차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유와 성적 매력, 계급 상승의 신화를 내포한 기호가 되며, ‘향수 향기가 아니라 여성성, 추억, 운명 같은 상징 체계를 대변하는 기호로 전환된다. 이러한 기호의 체계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심층을 흡수하고, 그것을 하나의소비 가능한 환상으로 재조직한다.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물질의 지배가 아니라, 이미지의 신화로 전환된다.

 

광고가 작동시키는 데미우르고스적 메커니즘은 인간을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기만한다. 하나는 시간성의 기만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기만이다. 첫째, 광고는 미래의 환상을 현재의 소비로 전이시키며, ‘이것을 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구조를 통해 시간의 구조를 폐쇄한다. 이때지금 결코 만족할 없는 상태로 재정의되고, 인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미래의 충족을 갈망하는지연된 주체 된다. 둘째, 광고는 존재의 본질을 외부로 전이시키며, 자아의 충만을 외부 사물의 소유로 전환한다. 자아는 스스로를 내면화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의 기호를 통해 자신을 정체화한다. 이러한 전이 구조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마야(, māyā)’ 기만적 작동과 동일하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얄다바오트는 인간의 앎을 차단하고, 가짜 세계를 실재로 믿게 만든다. 오늘날 광고는 얄다바오트의 화법을 반복한다. 그것은 말한다: “진정한 너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제품을 통해 너는 자신이 것이다.” 그러나 자신 결코 오지 않으며, 인간은 무한 소비의 굴레 속에 내면을 잃어간다.

 

구스타프 융은 이러한 광고적 신화 구조를원형(archetype) 상업화 해석할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 무의식 속에는 근원적 상징 구조가 존재하며, 그것은 집단적이며 초역사적인 형상들로 나타난다고 보았다(Jung, 1959, p. 142). 그러나 후기자본주의는 원형들을 이미지 산업 속에서 상품화하고, 탈신성화된 기호로 소비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 원형 모성의 본질이 아니라 특정 브랜드의 유아용품으로 대체되며, ‘영웅 원형 스포츠 스타의 이미지로, ‘구원자 원형 테크 기업 CEO 상징으로 환원된다. 이때 인간은 이상 원형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심층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표피적 재현을 소비함으로써 심층을 외면한다. 원형은 기호로 퇴행하고, 무의식은 알고리즘의 구조로 환원된다.

 

광고는 또한 실재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전환시키는 인식론적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은 이상 세계를있는 그대로인식하지 않고, ‘표현된 대로인식하게 된다. 구조는 엘리아데가 말한현대의 신화화 정면으로 일치한다. 엘리아데는 인간이 구조적으로 신화적 존재이며, 상징을 통해 실재와 관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은 상징적 능력을 상실하고, 외부 기호의 반복을 통해 의미를 추구한다(Eliade, 1957). 광고는 이러한 상징 능력의 쇠퇴를 구조화하며, 기호를 내면화시키는 대신 외부화된 반복을 강화한다. 인간은 세계와 대화하지 않고, 기호의 소비를 통해 존재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없다: 자본주의는 진정으로 존재를 해방하는가, 아니면 해방을 이미지로 대체하는가? 영지주의는 이에 대해 명확히 부정한다. 자본주의는 얄다바오트가 만든 환상의 체계이며, 인간 영혼을 실재로부터 단절시키는 신화적 기제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데미우르고스이며, 실재를 조작하고 앎을 외면하게 만든다. 플레로마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은 이미광고라는 동굴 벽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4.5. 종교 근본주의: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의 우상화

 

종교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의 의미를 모색하는 가장 오래된 상징 구조이다. 그러나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종교는 존재에 대한 개방적 통로가 아니라, 폐쇄적 권위의 체계로 변형되며, 플레로마의 빛을 차단하는 얄다바오트적 메커니즘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종교의 데미우르고스화는 바로 문자주의(literalism) 율법주의(legalism) 통해 구현되며, 우리는 그것을 오늘날종교 근본주의’(religious fundamentalism) 부른다. 근본주의는 단지 교리의 보수화나 사회정치적 반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폐쇄이며, 인간의 내면에 깃든’(gnosis) 가능성을 억압하는 구조적 장치다. 종교가 참된 신을 지향하는 대신, 데미우르고스의 질서 외적 권위와 규범적 기호 숭배하게 , 그것은 이상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영혼을 속박하는 신화적 감옥으로 기능한다.

 

영지주의의 근본적 인식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 보이는 세계는 참된 실재의 그림자이며, 배후에는 형상 이전의 근원적 충만, 플레로마(plerōma) 존재한다. 이때 데미우르고스는 바로 플레로마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구조의 대리자이며, 그는 세계를 창조했으되 진리를 알지 못한 자다. 『요한의 비밀서』는 데미우르고스 얄다바오트를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선언하는 자로 묘사한다. 그는 무지의 권위를 신성으로 착각하고, 자신이 창조한 질서를 절대화한다. 문자주의적 종교는 얄다바오트의 논리를 계승한다. , 문자에 담긴 진리를 초월적 계시로 전유하면서도, 문자의 심층적 의미에 도달하려는 영적 앎을 철저히 봉쇄한다.

 

문자주의는 경전의 텍스트를 유일한 진리로 전제하면서, 해석과 상징을 억압한다. 이때 경전은 살아 있는 신의 언어가 아니라, 고정된 규범의 명령으로 기능한다. 모든 의미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간주되며, 질문과 사유는 불경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엘리아데가 말한상징의 죽음 야기한다. 그는 상징이야말로 인간이 존재의 심층에 도달하는 통로라고 보았으며, 문자주의는 통로를 폐쇄한다고 보았다(Eliade, 1957). 문자주의는 신을말씀으로 환원시키되, 말씀을 생명 없는 표피로 고정하며, 신을 살아 있는 의미의 근원에서 추방한다. 결국 성서는 읽히지 않고, 인용되며, 해석되지 않고, 암송된다. 이때 인간은 이상 신을 향해 존재를 개방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자에 의해 규정된 존재로 전락한다.

 

율법주의는 문자주의의 제도적 구현이며, 인간 존재를 법의 테두리 안에 구조화하는성스러운 기계. 율법주의는 신의 뜻을 법률화하고, 경전적 규범을 윤리적 규제 장치로 전환하며, 내면의 도덕성을 외재적 복종으로 대체한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유혹의 가능성으로 간주되며, 자유는 억제의 대상이 된다. 이때 인간은 도덕적 자율성의 주체가 아니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도덕적 자동인형이 된다. 융은 이러한 율법주의의 심리 구조를의식의 외부화라고 불렀으며, 무의식적 자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억압 장치로 보았다(Jung, 1959, p. 88). 신의 뜻은 이상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는 존재의 호소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명령의 언어로 전락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체계를도그마적 에온’(Eonul dogmatic) 종교적 변종으로 이해하였다. 그는율법화된 신성은 이상 초월을 열어주지 않고, 초월을 봉쇄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말하였다(Blaga, 1931, p. 105). 도그마적 에온에서는 신이 계시한 말씀이 절대화되며, 인간의 인식은 특정한 해석 틀에만 복속된다. 구조에서 인간은 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신이 말했음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때 신은 존재의 심연에서 소환되는 내적 목소리가 아니라, 율법 조항으로 분절된 행위 규범의 관리자에 불과하다. 결국 종교는 앎의 장소가 아니라, 복종의 훈련장이 되며, 존재는 초월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규칙의 복제 행위로 축소된다.

 

이러한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는 종교를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 고착시키며, 과거의 계시를 반복하는 방식으로만 의미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때 종교는 역사적 생명을 상실하고, 제의의 기계로 기능하게 된다. 기도는 대화가 아니라 암송이고, 의례는 참여가 아니라 반복이며, 구원은 성찰이 아니라 자격의 문제로 전락한다. 구조는 플라톤의 동굴 은유를 다시 연상시킨다. 신앙인은 이상 신의 실재를 추구하지 않고, 신에 대한 기호의 그림자만을 추적하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신은 이상 존재의 근원이 아니라, 법과 기호의 연쇄로 환원되며, 인간은 플레로마를 향한 길을 잃는다.

 

영지주의는 이러한 종교적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진정한 구원은 외재적 계율의 준수가 아니라, 내적 (gnosis) 각성에 있다. 앎은 인간 존재 안에 잠재된 신성과의 접촉이며, 문자와 율법 이전의 실재와의 일치이다. 영지주의 문헌에서 구원자는 인간에게 새로운 율법을 주지 않고, 존재의 본질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너는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깨달으라”(Gospel of Thomas, logion 50). 기억은 외적 교육이 아니라, 내면의 조명이며, 데미우르고스가 제공하는 모든 지식을 해체하는 내적 앎이다. 지점에서 종교 근본주의는 앎의 적이며, 자유의 적이 된다. 그것은 신을 말하되, 신을 가리고, 진리를 말하되, 진리를 봉쇄한다.

 

오늘날 종교 근본주의는 특정 지역과 종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스펙트럼으로 확산된 이데올로기적 현상이다. 그것은 이슬람에서, 기독교에서, 유대교와 힌두교 안에서도 발견되며, 공통점은 문자와 율법을 절대화하는 경향이다. 근본주의는 탈근대적 불안 속에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방어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을 폐쇄된 구조에 감금한다. 이러한 구조는 데미우르고스가 작동하는 신화적 질서의 다른 얼굴이며, 인간의 영혼을 플레로마로부터 격리시킨다. 구원은 내면의 성찰이 아니라 외부의 규범에 의한 평가로 변질되며, 존재는 자유의 운동이 아니라, 순종의 목록으로 환원된다.

 

결국 우리는 물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구속하는가? 영지주의는 물음에 대해, 참된 종교는 인간 안의 신성과의 일치를 향한 내적 여정이어야 하며, 외적 율법의 반복이 되어서는 된다고 선언한다. 문자와 율법은 상징일 수는 있으나, 본질은 아니다. 그것들은 길잡이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신은 문자 안에 갇히지 않으며, 존재는 법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가 데미우르고스적 기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신을 다시 질문하고, 문자 너머를 사유하며, 율법 이면의 존재론을 탐색해야 한다. 바로 지점에서 종교는 다시금 존재의 통로가 되며, 인간은 플레로마의 기억을 회복할 있다.

 

4.6. 정보주의: 데이터주의적 인간관의 도래유발 하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신화는 이상 신의 이름으로 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데이터(data)라는 비물질적 형식과, 알고리즘이라는 수학적 문법 속에서 실현된다.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정보주의(informationalism)이며,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를 계산 가능한 정보 단위로 환원한다. 우리는 이를데이터주의’(dataism) 부를 있으며, 데이터주의는 자본주의, 과학주의, 기술주의의 최종 교차점에서 태동한 새로운 데미우르고스적 질서다. 질서는 인간의 감정, 기억, 사고, 심지어 자유까지도 데이터 흐름의 일환으로 전환하며, 존재를 코드화한다. 정보주의는 세계를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재조직하려는 창조적 권력을 자처한다. 이때 인간은 이상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계산되고 예측되는 자가 된다. 장에서는 이러한 정보주의적 인간관의 형성과정을 검토하고, 이를 대표하는 사상가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사유를 중심으로 영지주의적 비판을 시도한다.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Harari, 2015)에서인간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며, 자유의지는 신화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이 무의식적 생물학적 반응과 환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며, 미래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내면보다 정확하게 인간을 이해하게 것이라 전망한다. 전망은 과학기술과 인지과학의 통찰을 기반으로 하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에 대한 급진적 환원주의를 내포한다. 인간은 이상 신적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가 아니며, 세계의 주체도 아니다. 인간은 데이터 흐름의 노드이며, 존재의 목적은 효율적 계산과 정보 최적화다. 하라리는 세계를데이터 흐름의 성소 묘사하며, 인간이 이를 방해하지 않는센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arari, 2015, p. 361).

 

이러한 데이터주의는 영지주의가 비판한 데미우르고스적 권력의 현대적 구현에 다름 아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실재를 조작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조작된 질서를 진실이라 믿게 만든다. 정보주의는 물질 세계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인식과 실재의 조작자로 기능한다. 인간은 이상 감정과 영혼을 지닌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 생체 신호를 분석하고 알고리즘에 입력될 있는 양적 데이터로 환원된다. 이러한 구조는 『요한의 비밀서』에서 묘사된 데미우르고스 얄다바오트의 전략과 정밀하게 겹친다. 얄다바오트는 인간의 신성을 알지 못한 , 자신의 구조 속에 인간을 가두며, 구조를 실재로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데이터주의는 인간의 깊이를 알지 못한 , 인간의 복잡성을 정보로 치환하고, 그것을 존재의 전부로 주장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상은 표면적으로는 역사와 생물학의 통합적 접근을 표방하지만, 내면에는 신화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하라리는 인류의 진화사를 정보 처리의 역사로 환원하며, 종교와 예술, 윤리와 자유마저도 생존에 유리한 허구로 해석한다. 이때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반복을 최적화하려는 시스템이 된다. 이것은 단지 인식론적 전환이 아니라, 존재론적 축소다. 인간은 플레로마의 , 존재의 깊이와 무게를 지닌 존재로부터입력과 출력의 흐름으로 전락하며, 진리는 이상알려져야 아니라, ‘처리되어야 으로 바뀐다.

 

블라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데이터주의는자동사고의 승리이며, 창조적 인식 구조의 말살이다. 블라가는 인간의 인식이 미지에 대한 항구적 긴장과 존재의 비가시성과의 조응을 통해 창조된다고 하였다(Blaga, 1931, p. 114). 그러나 데이터주의는 모든 인식을 코드로 환원하고, 모든 가능성을 통계적 예측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심연을 제거한다. 이때 인간은 앎의 주체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정의되는 객체로 전환되며, 정신의 창조적 운동은 불필요한 오류로 간주된다. 이것은파괴적 사고’(gândire distructivă) 부정이며, 인식의 플레로마적 차원을 봉쇄하는 폐쇄적 구조다.

 

정보주의의 가장 깊은 문제는 인간의 내면적 자유를 비가시화한다는 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 사랑과 고통은 데이터의 노이즈로 간주되며, 의미 없는 잔여로 해석된다. 하라리는 자유의지를진화가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주장하고, 대신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아는 시스템 결정을 위임할 것을 제안한다(Harari, 2015, p. 409). 이때 인간은 자기 존재를 외부 기계에게 위탁하는 존재가 되며, 위탁은 단순한 기술적 수단을 넘어 존재론적 주권의 포기다. 영지주의적 관점에서는 이것이야말로내면의 기억 상실이다. 인간은 자기 안의 신성을 망각하고, 외부 질서에 존재의 해답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외부 질서는 언제나 데미우르고스의 장이다. 참된 앎은 외부가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내적 계시에 의해 가능하다.

 

융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보주의는 인간 무의식의 탈구조화이며, 영혼의 상징 능력에 대한 체계적 부정이다. 그는 무의식의 심층 구조가 인간 정신의 중심이며, 상징을 통해 무의식과 의식의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Jung, 1964, p. 218). 그러나 정보주의는 상징을 불필요한 오류로 간주하고, 모든 의미를 즉각적인 데이터 반응으로 환원한다. 이때 무의식은 이상 인식의 자원이 아니라, 조작 대상이 되며, 인간은 상징의 창조자가 아니라 반응 알고리즘으로 전락한다.

 

결론적으로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주의는 인간을 향한 예리한 통찰을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본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데미우르고스적 환상을 재현한다. 그는 인간을 넘어서려는 충동을 긍정하지만, 초월은 플레로마를 향한 길이 아니라, 계산된 기계의 길이며, 자유는 존재의 비극적 무게를 제거한 기능적 선택에 불과하다. 영지주의의 빛은 이러한 기계적 초월을 구원의 길이 아니라 기만의 구조로 해석하며, 인간은 다시금 자기 내면의 기억과 직관, 존재의 진동을 통해 진정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보주의는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다. 그것은 신을 대신하여 알고리즘을 제단에 세우고, 구원의 언어를 데이터 분석으로 치환하며, 인간의 영혼을 통계 모델로 변환한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은 데이터의 합이 아니며, 존재의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열어가는 의식의 신비이다. 신비는 예측될 없고, 정량화될 없으며, 오직 직관과 침묵, 그리고 내면의 앎을 통해만 접근될 있다. 영지주의는 신비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의 기억이며, 존재의 회복이며, 데이터 너머의 진실이다.

 

5. 플레로마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 자유, 회복의 존재론

 

 

5.1. 플레로마란 무엇인가: 충만의 세계, 원형적 본래성

 

플레로마(Pleroma) 영지주의적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적이며 결정적인 개념이다. 용어는 본래 그리스어 πλήρωμα에서 유래하며, ‘충만’, ‘가득참’, ‘완전함 뜻한다. 그러나 영지주의 문맥에서 플레로마는 단순한 풍요나 양적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래적 상태이자 모든 실재의 근원적 충일성을 지칭한다. 플레로마는 시간과 공간, 분리와 단절, 결핍과 무지를 넘어서 있는 절대적 충만성의 장이며, 안에서 신성과 인간, 영혼과 , 실재와 형상은 구분 없이 일치한다. 인간이 잃어버린 기억의 장소, 앎의 기원, 자유의 원천으로서의 플레로마는 단지 신화적 상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귀환의 사상적 극점이다.

 

영지주의 문헌, 특히 『요한의 비밀서』는 플레로마를 신적 존재의 원형 상태로 묘사한다. 상태는 분리나 구별, 언어적 구문화가 시작되기 전의 존재적 통일성으로, 모든 에온들(eons), 신적 존재의 위상들이 조화 속에 머무는 상태이다. 플레로마는 침묵 속에서 태어나며, 이전의 진리, 이름 이전의 신성이다. ‘플레로마는 말로 표현될 없으며,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직 존재로서 존재하는 충만한 신적 실재다라는 진술은, 데미우르고스의 형상적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 상태를 전제한다(『요한의 비밀서』, ca. 2nd c.).

 

데미우르고스가 구성한 세계가 형상과 언어, 법과 규칙, 기호와 이미지로 구성된 환상의 체계라면, 플레로마는 모든 가시성 이전의 침묵적 실재이다. 데미우르고스의 질서가 '구성된 실재', 다시 말해 무지로부터 비롯된 구조화된 실재라면, 플레로마는 '태고의 비구성적 실재', 어떤 의미로도 가공되지 않은 순수 존재다. 이때 플레로마는 단지 우주의 상층에 존재하는 신적 영토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중심이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기억이다. 우리는 플레로마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탈각되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실재의 망각위에 세워진 세계일 뿐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이러한 플레로마적 실재를신성한 시간과 공간 경험으로 해석한다. 그는 인간이 거주하는 일상적 세계, 속된 시간과 공간 단지 사건들의 축적이며, 플레로마적 세계는신화적 현재, 영원한 반복 가능성의 이라고 정의한다(Eliade, 1957). 플레로마는 결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모든 시간이 공존하는 현재, ‘kairos’로서의 순간이다. 이때 구원은 연기된 보상이 아니라, 존재가 순간에 자기를 회복하는 사건이며, 인간은 앎을 통해 순간에 도달할 있다. 앎은 정보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진동이며, 진동이 바로 플레로마의 울림이다.

 

루치안 블라가는 플레로마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의형이상학적 미지(Misterul transcendent)’ 개념은 플레로마 개념과 구조적으로 깊은 상응을 가진다. 그는 인간 인식의 근원에는 항상 접근 불가능한존재의 심연 있으며, 심연은 어떤 인식도 완전히 도달할 없는 성역이라고 보았다(Blaga, 1931, p. 96). 이때 인간이 있는 유일한 행위는, 심연의 주변을 도는 창조적 사고, 파괴적 사고(gândire distructivă)’이며, 사고를 통해 인간은 형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형상 이전의 진동을 감지하게 된다. 바로 심연, 진동, 없는 의미가 플레로마의 철학적 동의어이다. 블라가는 말한다: “실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감춘다. 감춤은 형상으로 인식될 없으며, 오직 미로로 경험될 있다”(Blaga, 1931, p. 114). 플레로마는 바로 미로의 중심, 구조 이전의 무구조적 심층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플레로마는존재 자체(Sein selbst)’와도 통한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는 언제나 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존재자는 존재를 망각한 상태에서 세계에 개입한다고 본다(Heidegger, 1927). 망각은 단지 철학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의 본질적 조건이며,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 바로 망각을 자각하고, 존재의소리 없음 기울일 있을 ,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형식으로 도약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은폐성 영지주의가 말하는 플레로마의비가시성,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모두실재는 드러난 것에 있지 않다 점에서 동일한 직관을 공유한다. 플레로마는 하이데거적 존재의진실(Aletheia)’이며, 인간은 진실을 직면함으로써 실존의 전회(Ereignis) 가능케 한다.

 

융에게 있어 플레로마는자기(Self)’ 심층적 차원이다. 그는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자아(ego) 초월한 자기(Self) 있으며, 자기는 집단무의식과 원형의 장에서 구조화된 초개인적 실재라고 보았다(Jung, 1959, p. 183). 인간이 자아의 반복과 방어, 투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와의 조응에 도달할 , 순간이 바로 존재의 전환점이며, 이때 인간은 플레로마와의 비가시적 일치를 체험한다. 융은 이를개성화의 여정이라고 불렀으며, 여정은 플레로마적 본래성의 회복이다. 이때 플레로마는 단지 종교적 구조가 아니라, 심리적 구조, 인간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에 있는존재의 이다.

 

결국, 플레로마는 초월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장소이며, 실재의 본래성이다. 우리는 거기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존재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자기 진동의 재각성이다. 진동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존재하는 자체로 충분하다. 플레로마는 모든 형상 이전의 침묵 속에 있으며, 침묵은 앎의 가능성이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며, 질문이 진정으로 플레로마를 향할 , 데미우르고스의 가면은 벗겨진다.

 

그리하여, 플레로마는 단지 구원받는 세계가 아니라, 기억되어야 세계이며,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니라, 존재했으나 우리가 듣지 못한 세계다. 우리는 다시 세계를 듣고, 세계를 말하며, 세계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플레로마이며, 앎이며, 자유이며, 회복이다.

 

5.2. 참된 (Gnosis) 영혼의 회복구원의 내적 계시

 

영지주의(Gnosis) 중심에는 하나의 인식론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이 있다. 여기서 ‘gnosis’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 교의의 습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의 전율이며, 실재를다시 보게 되는 시선이며, 동시에 인간 영혼이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기억의 회복이다. 앎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내적 계시(revelatio interior)로서, 인간 존재의 심연에 자리한 플레로마와의 접속을 뜻한다. 참된 gnosis 영혼의 귀환이며, 귀환은 단지 구원을 받는 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형식 자체가 되는 존재론적 회복이다.

 

고대 영지주의 문헌은 일관되게 gnosis내면에서 비롯되는 으로 묘사한다. 『토마스 복음서』는 말한다: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 그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안에 없는 것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어둠 가운데 머무르게 된다”(logion 70). 문구는 영지주의의 인식론이 존재론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외재적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빛을 재발견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때 앎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반응이며,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가다시 열리는 순간이다. gnosis기억되는 이며, ‘회복되는 존재. 그리고 앎은 데미우르고스의 거짓 구조를 해체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의 심연, 플레로마와의 일치를 다시금 체현하게 만든다.

 

이러한 gnosis 반드시 데미우르고스적 인식 구조에 대한 부정을 포함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세계를 만든 자이며, 동시에 인간을 자신이 만든 허상 속에 가둔 자다. 그는 감각과 기호, 법과 질서를 통해 실재를 위장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위장을 실체로 믿게 만든다. 영지주의는 거짓 실재로부터의 각성을이라 부르며, 앎이야말로 구원의 핵심이다. 여기서 구원은 윤리적 완성도 아니며, 도덕적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무지(agnosia)로부터의 해방이며, 실재에 대한존재론적 개안(開眼)’이다. 이때 눈을 뜨는 것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며, 시선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다. 그것은네가 자신을 , 너는 너를 낳은 자를 알게 이라는 『요한의 비밀서』의 핵심 선언에 요약된다.

 

이러한 관점은 미르체아 엘리아데의성스러운 시간의 체험개념과 구조적으로 조응한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인간은 신화적 행위와 의례를 통해원초적 시간으로 귀환할 있으며, 시간 안에서 인간은 존재의 충일함을 회복한다(Eliade, 1957). 그는 시간을순환하는 시간 아니라, ‘실존적 개방의 시간으로 보았고, 그것은 의례의 반복을 통해 다시 열린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gnosis 의례 이전의 존재적 개방을 말하며, 신성한 시간의 체험이 외적 행위를 통해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불현듯 발현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급진적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시간의 바깥에 있는 사건이며, 플레로마의 기억이 시간 안에서 반짝이며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때 gnosis 철저히 비체계적이고 비전략적이다. 그것은 전수되거나 설계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기치 않게 다가오며, 인간 존재의 균열 속에서 침입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를무의식적 계시 부르며,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자기 자신이 구성하지 않은 인식 의해 구조화된다고 보았다(Blaga, 1931, p. 123). 블라가에 따르면, 인간은 알지 못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으며, 알지 못하는 앎은존재의 심연에서 솟는 기호 없는 직관이다. 이때 gnosis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존재의 파열이며, 그것은 말의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고, 침묵의 세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침묵에 기울일 ,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기억은 심리적 회상이나 과거의 재구성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본래성 회복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이는자기의 통합으로 표현된다. 자아(ego) 외부 세계와 타자의 요구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지만, 자기(self)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정, 상징과 본능이 통합된 전체 구조다(Jung, 1964, p. 221). 인간이 자기를 회복할 , 그는 이상 외부적 규범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내면의 상징과 신화를 통해 자신을 읽기 시작한다. 그때의 앎은내가 누구인가 대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누구였는지를 회복하는 사건이며, 앎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존재의 중심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이러한 앎은 실천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 이전의 존재의 전환을 전제한다. 윤리도덕적 행위는 앎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조건은 아니다. 이는 데미우르고스적 종교 구조가 말하는 율법적 구원, 이것을 행하면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구조와 본질적으로 단절된다. 영지주의적 gnosis앎이 구원이며, 존재의 중심이 앎과 일치할 구원은 이미 실현된 이라는 구조를 지닌다. 이것은 플라톤의기억으로서의 ’(νάμνησις, anamnesis)과도 깊이 연결된다. 플라톤은 앎이란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영혼이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Plato, Meno, 81d). 영지주의에서의 gnosis 또한 인간이 언제나 중심에 품고 있었던 기억이며, 그것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질 , 인간은 존재를 구속하는 외부 구조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를 말하는 자유로운 자가 된다.

 

지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알레테이아’(λήθεια), 진리의 본래 의미와 gnosis 연결지을 있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단지 명제적 정합이 아니라, 존재가 은폐를 벗고 드러나는 사건이다(Heidegger, 1927). 진리는 드러남이며, 드러남은 언제나 감춰짐 속에서 이루어진다. 영지주의적 gnosis 바로 이러한 드러남의 구조를 갖는다. 인간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존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속에서 비가시적인 빛이 갑자기 열릴 , 진리는 자기 자신으로 드러난다. 드러남이야말로 구원이자 회복이며, 앎의 본질이다.

 

따라서, gnosis(그노시스) 실천이나 지식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구조적 열림이며, 실재의 은폐로부터 벗어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인간은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구조 안의 아닌, ‘실재와 조응하는 인식하게 되며, 그때의 존재는 이상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구속은 구조 안에서만 발생하며, 플레로마와 접속한 존재는 어떤 질서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계율이 아니라 충만이며, 존재는 도착이 아니라 회복이며, 앎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이것이 영지주의가 말하는 구원이자, 플레로마적 인간의 삶의 가능성이다.

 

5.3. 데미우르고스적 인간과 플레로마적 인간의 존재 양식 비교

 

존재론적 지형의 심연을 탐색하는 철학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양식을 묻는다. 영지주의적 전통에서 물음은 하나의 대극적 구조로 전개된다. 한편에는 데미우르고스의 거짓 질서에 매몰된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플레로마의 빛을 기억하고 회복한 인간이 있다. 둘은 단지 도덕적 상태의 차이나, 구원 여부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살아내는 방식의 근원적 차이이며, 존재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응답이다. 데미우르고스적 인간(homo demiurgicus) 형상과 기호, 규칙과 질서 속에 갇힌 존재이며, 반면 플레로마적 인간(homo pleromaticus) 앎과 침묵, 자유와 내면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자이다. 장에서는 인간 형식의 존재 양식을 인식론, 실존, 상징 작용, 자유 개념을 중심으로 비교 분석한다.

 

먼저 인식론적 차원을 살펴보자.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외부 세계에 대한 적응을 지식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며, 세계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하려 한다. 그의 앎은 객체 중심이며, 사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러한 앎은 현대 과학의 토대를 이루며, 유발 하라리가 말한인간은 생물학적 알고리즘이다라는 명제와도 구조적으로 일치한다(Harari, 2015, p. 409). 그러나 이러한 앎은 언제나 바깥을 향한 시선이며, 존재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는다.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실재를 외부에서 수집하는 데이터로 간주하며, 앎을 축적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해한다.

 

반면 플레로마적 인간은 앎을 존재의 내면에서 솟는 진동으로 체험한다. 그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일치하는 자이며, 일치는 내면의 기억이 불현듯 살아나는 계시적 사건이다. 이때 앎은 정보가 아니라 해방이며, 대상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회복이다. 『요한의 비밀서』는 인간이 자신을 , 자신의 빛과 형상, 그리고 자기 안에 잠든 자를 깨울 ’, 진정한 실재에 도달한다고 말한다(Apocryphon of John, ca. 2nd c.). 앎은 자기 밖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의 열림이며, 앎은 이상 외부를 구성하지 않고, 내부의 침묵을 해방시킨다.

 

실존적 차원에서,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항상 외부의 질서와 타자의 인정 속에서 확인한다. 그는 사회적 규범, 종교적 교리, 과학적 진술, 법적 제도 속에서 자기 위치를 탐색하고, 질서 안에 자리 잡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이때 그의 존재는 자율적이지 않다. 그는 항상 외부 질서의 복제를 통해 존재하며, 자율성과 자유는 제도적으로 부여된 허가로 환원된다. 이러한 존재는 하이데거가 말한타자 속에 빠진 존재’(Verfallenheit) 전형적 예이며, 자기 존재의 중심이 항상 바깥으로 전치되는 존재 양식이다(Heidegger, 1927).

 

반면 플레로마적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외부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발견한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으며, 존재 자체가 의미라는 사실을 체현한다. 이러한 인간은 내면의 침묵에 머무르며, 의미를 구성하기보다, 의미가 흐르는 장소가 된다. 그에게 실존이란 선택의 자유 이전에존재의 회복이며, 회복은 언어와 형식 이전의 존재적 진동이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러한 존재를상징의 인간이라 불렀고, 그는 존재가 언어화되기 전의 상태에서 세상을 감지한다고 보았다. 블라가에 따르면, “존재는 표현될 없으며, 다만 암시될 있을 뿐이다”(Blaga, 1931, p. 136). 플레로마적 인간은 바로 암시를 듣는 자이며, 침묵을 살아내는 자다.

 

상징 작용의 차원에서도 둘은 현저히 구별된다.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상징을 정지된 기호로 다룬다. 그는 상징을 통제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질서로 이해하며, 그것을 체계화하고 분류함으로써 의미의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문자주의나 과학적 알고리즘화,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 조작에서 나타난다. 상징은 이상 의미의 미지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체계의 반복으로 환원된다. 융은 이를퇴행적 상징이라 불렀고, 집단적 무의식이 창조성을 상실한 상태로 작동할 나타난다고 보았다(Jung, 1959, p. 198).

 

반대로 플레로마적 인간은 상징을통과하는 으로 경험한다. 그는 상징을 해석하지 않고 살아내며, 상징을 읽지 않고 들으며, 상징은 언제나 다층적이며 무한한 해석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의 언어 속에서 침묵의 뿌리를 감지하며, 기호의 수면 아래에서 형상 이전의 세계를 기억한다. 엘리아데는 이를성스러운 상징의 체험이라 불렀고, 인간은 상징을 통해 세계의 깊이와 접속한다고 보았다(Eliade, 1957). 플레로마적 인간은 바로 접속을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현하며, 삶을 상징의 순례로 살아낸다.

 

자유의 개념에서도 둘은 대립된다.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에게 자유는 선택의 폭이며, 행동의 허가이며, 외적 조건의 개방성이다. 그는 자유를 통제 가능한 질서 안에서의 유연성으로 이해하며, 자유는 언제나 시스템 안에서만 존재할 있는 제도적 허락이다. 자유는 자율이 아니라 관리된 자유이며, 인간이 많이 선택할수록 많이 구조화되는기만적 자유. 이때 자유는 인간에게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형식적 족쇄가 된다.

 

그러나 플레로마적 인간에게 자유는 존재의 상태이며, 내면의 기억이다. 그는 자유롭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자유롭다. 자유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앎의 결과이며, 앎은 존재의 중심에서 솟는 직관이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자유는너는 이미 자유롭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되며, 이는 데미우르고스적 세계가 구성한 모든 허위 질서를 해체하는 존재적 힘이다. 자유는 행동의 문제이기 이전에, 존재의 진동이며, 앎의 반향이다.

 

결론적으로,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외부 구조에 의해 형성된 존재이며, 존재는 항상 결핍을 전제로 한다. 그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며, 부족을 메우기 위해 소유하고 따르고 규율에 복종한다. 반면 플레로마적 인간은 충만을 전제로 하며, 그의 존재는 이미 완결되어 있으며, 앎은 충만의 회상이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단지 철학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요청이다. 우리는 어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기억하며, 어떤 존재를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응답이 것이다. 플레로마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세계를 다시 듣고, 다시 말하고,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앎의 방식이며, 자유의 방식이며, 회복된 인간의 방식이다.

 

6. 데미우르고스적 세상에 대한 인식

 

 

6.1. 세계가 데미우르고스적임을  인식하는 인간 구원의 출발

 

모든 구원은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인식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나 인지적 판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전면적인 존재론적 전회이며, 인간이 자신이 처한 세계의 본질을 직면하는 사건이다. 영지주의 전통에서 구원이란 신적 힘에 의한 외적 구출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깃든 진실에 대한 내적 회귀이며, 회귀는 데미우르고스적 세계가거짓으로 조직된 실재임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 구원은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인식은 인간 존재를 구조적으로 전환시키는 단계이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얄다바오트는나는 신이며, 외에 다른 이는 없다 선언한다. 그러나 선언은 오히려 그가 진정한 신으로부터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며,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전부라고 착각한다. 영지주의는 세계가 실재의 유일한 전모가 아니라, 오히려 실재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층위적 구조임을 폭로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실재를 만들지 않았고, 다만 실재를 모방했을 뿐이다. 인간이 사실을 인식하게 , 그는 이상 세계의 구조에 맹종하지 않으며, 존재의 본질을 외부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데미우르고스적 세계를 인식한다 것은 단순히 철학적 선언이나 종교적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계사회적 질서, 정치적 체계, 종교적 교리, 경제적 행위, 언어적 규범 실재 자체가 아님을 체감하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시스템이며, 시스템은 통제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 반복 가능성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를도그마적 에온이라 부르며, 인간의 인식이 고정된 형식과 기호 안에서만 작동하도록 구조화된 시대의 질서를 지칭한다(Blaga, 1931, p. 105). 질서 속에서 인간은 살아 있는 상징을 경험하지 못하며, 반복된 규칙과 외부적 명령 속에 존재를 위탁한다.

 

데미우르고스적 세계는 감각 가능한 것으로만 실재를 정의하고, 존재를 물질로 환원하며, 앎을 정보로 축소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욕망하는 주체로 길들여지고, 광고 이미지, 이데올로기, 기술적 명령, 경제적 교환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이상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자이다. 구조는 실재를 분절하고, 기호를 정지시키며, 존재의 흐름을 봉쇄한다. 그것은 언제나 구속을 자유로 포장하고, 기만을 질서로 위장하며, 무지를 진리로 치환한다. 인간이 이러한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 , 그는 결코 구원에 이를 없다.

 

지점에서 구스타프 융의 분석은 탁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 내면에 작동하는그림자’(shadow) 개념을 통해, 우리가 억압하고 외면해 무의식적 내용들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보았다(Jung, 1959, p. 147). 데미우르고스적 세계는 바로 억압의 외화이며, 무의식의 그림자가 세계 구조로 환원된 상태다. 인간이 세계를사실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자기 무의식을 외부 질서에 투사하며, 내면의 주권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데미우르고스적 세계의 인식이란, 외부 세계의 구조를 직시함과 동시에,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자각하는 일이다. 자각이 영혼의 회복이며, 구원의 출발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존재 망각으로 규정하며, 존재의 진실은 언제나 은폐되어 있다고 말한다(Heidegger, 1927). 은폐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구조적 망각이며,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감춰진다.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는 바로 존재 은폐의 형식화된 표현이다. 세계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진실을 철저히 감추며, 존재의 고유한 진동을 전면에서 봉쇄한다. 이때데미우르고스적 세계를 인식한다 것은, 존재의 은폐를 감지하고, 은폐가 인간 정신에 남긴 흔적을 되짚는 일이다. 앎은 드러남이 아니라 드러남을 감지하는 능력이 되며, 진리는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존재의 여백이다.

 

이러한 인식은 극히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익숙했던 모든 구조와 규범, 관념을 의심하게 만들며,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블라가는 이러한 인식의 구조를파괴적 사고(gândire distructivă)’ 불렀고, 그것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존재의 표면을 찢고 심층을 향해 돌진하는 정신의 용기라 보았다(Blaga, 1931, p. 44). 인간이 데미우르고스적 세계를 인식하는 순간, 그는 과거의 모든 앎과 믿음을 해체해야 하며, 해체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실재의 감각이 태동하게 된다.

 

이때 데미우르고스는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구조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두려워하며, 실재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공급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구조를 내면화한 상태이며, 데미우르고스는 내면화된 구조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구조를 인식하는 일은, 외부 질서의 분석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면화된 권력 구조의 감별이다. 인간은 구조를 자기 내부에서 해체할 비로소 진정으로 해방된다.

 

따라서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구조가 해체되는 사건이며, 사건은 인식으로 시작된다. 인식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며, 논리가 아니라 감응이며, 분석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이다. 인간은 존재의 비가시적 심연을 감지하고, 감지의 진동 속에서 자기 존재를 다시 쓴다. 이때의 글쓰기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침묵에 대한 응답이며, 응답이야말로 앎이 되고 자유가 되며 회복이 된다.

 

결국, 데미우르고스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란, 단지 비판적 사유의 출발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을 위한 통과의례이며, 진리의 문턱에 이르는 인간 정신의 걸음이다. 그것은 철학의 기원이자 종교의 심연이며, 신화의 해체이자 앎의 탄생이며, 무엇보다 구원의 전제이다. 구원은 세계의 너머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를 다시 보는 시선, 시선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만남이 바로 플레로마의 기억이며, 영혼의 귀환이다.

 

6.2. 현재 인류의 갈림길: 환상의 가속화인가, 존재의 회복인가

 

우리는 지금, 실재가 이상 실재로 경험되지 않고, 이미지와 정보, 구조화된 체계의 안에서만 인식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존재는 데이터로 환원되고, 앎은 알고리즘에 포섭되며, 자유는 선택 가능한 옵션들의 목록으로 치환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은 이상존재하는 아니라, ‘구성된 ’, ‘관리되는 ’, ‘측정 가능한 전락하며, 자율적 정신은 구조적 환상 속에 함몰된다. 데미우르고스적 질서는 이제 신화 이름을 벗고, 기술,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전면적으로 내재화된 체계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가 완결될수록 인간은 실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망각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이러한 문명의 문턱에서, 인류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있다. 그것은 환상의 가속화인가, 존재의 회복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다.

 

환상의 가속화는 현대 세계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경향이다. 그것은 많은 이미지, 빠른 속도, 복잡한 네트워크, 정교한 모방, 정제된 통제의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과정은 보드리야르가 말한하이퍼리얼리티 전면화이며, 현실이 현실을 모방한 기호에 의해 대체되는 시뮬라크르의 지배 체제다(Baudrillard, 1981).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이상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며, 오히려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때의 인식은 체험이 아니라 중계이며, 앎은 체현이 아니라 분배이고, 기억은 삶의 반추가 아니라 클라우드 서버의 호출이 된다. 결과, 인간은 실재와의 모든 존재론적 접속을 상실한 , 이미지와 기호의 무한 재생산 속에서실재 아닌 실재 소비한다.

 

이러한 소비는 단지 물질적 사물의 소비가 아니라, 의미, 감정, 기억, 상징, 윤리, 종교의 소비이며, 모든 영역이 시장의 코드로 환원되면서 인간은존재의 자본화 살아간다. 존재는 이상 고유하거나 신비하지 않으며, 재현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고 상품화 가능해야 한다. 루치안 블라가는 이를문화의 도그마화 불렀으며, 문화가 이상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기호를 반복하는 메커니즘으로 전락한다고 보았다(Blaga, 1931, p. 88). 도그마화는 인간이자기 자신을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체계이며, 모든 앎을 구조의 경계 안으로 봉합한다. 환상의 가속화는 체계의 자기 재생산이며, 인간의 실존적 심화가 아닌, 인식의 평면화로 귀결된다.

 

영지주의 전통은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존재의 회복이며, 회복은 단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실존적 결단이다. 존재를 회복한다는 것은 실재를 다시 감각하고, 세계와의 조응을 회복하며, 자기 내면의 심연을 다시 듣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해체이자 상징의 복원이자 침묵의 재청취이며, 무엇보다도앎의 회복이다. 여기서 앎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존재하는 것이다. 플레로마는 여전히 존재하며, 인간은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영지주의는 구원이란 잃은 것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망각된 것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기억은 단지 과거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구조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 인간이 존재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상태, 질문 가능성 자체가 구조적으로 봉쇄된 상태를 의미한다(Heidegger, 1927). 존재의 회복은 바로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이며, 질문이 바로 실재로의 귀환을 여는 문이다. 존재는 언제나 은폐되어 있었고, 진리는 언제나 구조에 의해 눌려 있었으며, 구조는 언제나 데미우르고스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구조를 해체할 있으며, 해체는 감각과 언어, 상징과 신화의 수준에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

 

존재의 회복은 단지 개인의 종교적 각성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치학이다. 왜냐하면 환상의 가속화는 인간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힘이 되었고, 힘은 기술, 금융, 교육, 의료, 심지어 예술과 종교까지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를 회복한다는 것은 모든 영역에서 실재와의 접속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며, 구조의 억압을 넘어서 삶의 신비를 다시 감각하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말한신성의 복원이란 존재론적 감각의 재활성화이며,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사건이다(Eliade, 1957).

 

융은 이러한 회복을개성화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원형과 상징, 무의식적 메시지들을 통합할 , 비로소 자기로서 존재할 있으며, 자기란 플레로마의 응답이기도 하다(Jung, 1964, p. 238). 개성화란 사회적 역할의 성취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여정이며, 여정에서 인간은 이상 타자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않고, 자기 내면의 빛에 기울인다. 이러한 여정은 혼란과 침묵, 불확실성과 고통의 여정이지만, 바로 여정이 존재의 진실한 도달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인류의 갈림길은 단지 문명의 진보냐 퇴보냐, 기술의 승진이냐 윤리의 파산이냐라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실재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할 것인가, 존재를 어떤 양식으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결단의 문제다. 환상의 가속화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제거하며, 앎을 표피화한다. 반면 존재의 회복은 감각을 되살리고, 기억을 회복하며, 앎을 존재화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단지 철학의 선택이 아니라, 인류의 선택이며, 존재 자체의 운명이다.

 

지금이 바로 문턱이며,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다시금 존재를 사랑하는 일이며, 실재를 욕망하는 일이며, 진실을 감히 말하는 일이다. 그것은 플레로마를 기억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고요한 결단이며, 시대의 가장 근원적 혁명이다.

 

7. 결론

 

논문은 데미우르고스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이데올로기의 신화적 구조를 분석하고, 영지주의적 인식틀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회복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과정은 단지 종교사적 개념의 현대화나 신화의 인류학적 재해석이 아니라, 존재론과 인식론, 심리학과 정치철학을 가로지르는 전면적인 사유의 재구성이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신화적 상상 속의 피조물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에 내면화된 구조적 힘이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규율하며 의미를 재현하는 질서의 은유이다. 질서는 단지외부적 권위로서만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감각, 기억, , 상징, 욕망의 형식을 통해 작동하는 내재화된 기제이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의 해체는 인간 인식과 존재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조율하는 철학적 사건을 요구한다.

 

우리는 민족주의, 전체주의, 과학주의, 자본주의, 종교 근본주의, 정보주의 다양한 현대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검토하였다. 각기 상이한 배경과 형식, 작동 원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하나의 공통된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외부 구조에 종속시키고, 내면의 자율성과 심연적 앎의 가능성을 억압하는데미우르고스적 작동이었다. 작동은 상징의 죽음으로 귀결되며, 존재의 다층적 의미망은 평면적인 질서로 환원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를 신화로 포장된 시스템에 위탁하며, 신성의 기억은 이미지와 기호의 노이즈 속에 침몰한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서, 진정한 구원이란 데미우르고스 질서의 전복이며, 전복은 폭력적 전쟁이나 제도적 반혁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에 대한 앎의 방식의 변형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전환은플레로마개념의 철학적 심화를 통해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플레로마는 종교적 천상계가 아니라, 존재의 본래성과 충만성, 기억과 앎의 원형적 구조를 뜻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직 잃지 않은 기억이며, 모든 형상 이전에 있었고, 모든 이전에 울리던 진동이다. 플레로마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의식적 심연 속에서 자기 존재의 진실한 중심을 회복한다는 뜻이며, 회복은 단지 내면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존재를 살아내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다. 영지주의적 (gnosis) 회복의 형식이며, 앎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있었던 세계를 다시 읽는 자가 된다.

 

이러한 회복은 인간 존재의 이중 양식데미우르고스적 인간과 플레로마적 인간 분기점으로 삼는다. 데미우르고스적 인간은 자기 외부의 구조를 실재로 간주하며, 모든 의미를 타자의 기준에 따라 획득한다. 그는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며, 인정받음으로써 실현되며,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한다. 이에 비해 플레로마적 인간은 내면의 앎에 의해 존재하며, 자기 자신과의 일치 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 그는 없는 침묵 속에 기울이며, 상징의 무한한 울림을 따라 존재를 해석한다. 이때의 해석은 고정된 텍스트의 독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실재의 반향에 대한 응답이다. 인간의 존재 양식은 단순한 삶의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근본적 태도의 차이며,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결단이다.

 

결국 논문은 하나의 귀결을 향해 수렴한다. 인간은 지금 하나의 문턱에 있다. 그것은 단지 기술 문명의 진보나 사회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와 실재, 앎과 자유, 기억과 침묵에 대한 전면적 사유 전환의 문턱이다. 문턱에서 인류는 환상의 가속화, 데미우르고스적 질서의 자기 재생산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혹은 존재의 회복, 플레로마의 기억을 되살리는 새로운 인간의 형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선택은 단지 개인의 윤리적 성숙의 문제가 아니며, 문명의 근간을 다시 묻는 존재론적 결단이다. 영지주의가 제시한 사유는 결단을 위한 하나의 사유적 지도이며, 기억으로 가는 길의 잃어버린 문장들이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을 기억하는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향하는 세계는 진정한 실재인가, 아니면 정교하게 구성된 환상인가? 물음이야말로, 데미우르고스의 가면을 벗기고, 플레로마의 침묵을 다시 들을 있는 번째 열쇠가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concept of the Demiurge, central to ancient Gnostic cosmology, as a philosophical metaphor for the structural forces of modern ideology. Drawing on sources such as The Apocryphon of John and The Gospel of Thomas, as well as the works of Mircea Eliade, Lucian Blaga, C.G. Jung, Friedrich Nietzsche, and Martin Heidegger, the study critically analyzes the mytho-ideological dimensions of contemporary systems including nationalism, totalitarianism, scientism, capitalism, religious fundamentalism, and dataism.

 

The Demiurge is reinterpreted not as a mythical creator deity but as a symbolic figure representing the false totalities that dominate human perception, suppress inner autonomy, and obstruct existential authenticity. Against this closed system of illusion and control, the paper retrieves the notion of Pleroma—the primordial fullness of being—as the ontological and symbolic ground for human restoration.

 

Through a Gnostic framework, true gnosis is understood not as external information but as an inner awakening, a remembrance of one’s ontological depth and divine immanence. The paper distinguishes between the Demiurgic human—who is formed by external norms, images, and laws—and the Pleromatic human—who lives from within, attuned to symbolic resonance, silence, and existential freedom.

 

In its final analysis, the study argues that humanity today stands at a threshold: between the acceleration of illusion and the restoration of being. Gnosis, in this context, is not merely a religious awakening but a metaphysical decision, a return to the question of being, and an act of resistance against the totalizing forces of modern ideological orders. Thus, this work proposes a philosophical pathway of remembrance and interior freedom as a possible response to our contemporary existential crisis.

Keywords: Demiurge, Pleroma, Gnosticism, Ideology, Ontology, Human Being, Gnosis, Myth, Restoration, Structural Critique

 

참고문헌

 

Blaga, Lucian (1931). Eonul dogmatic. București: Cartea Românească.

Eliade, Mircea (1957). The Sacred and the Profane: The Nature of Religion. 서울: 한길사, 2005 (원서 기준: Harcourt, New York).

Harari, Yuval Noah (2015). Homo Deus: 내일의 역사. 서울: 김영사.

 Heidegger, Martin (1927). 존재와 시간, 전양범 옮김. 서울: 새물결, 1998.

Jung, C.G. (1959).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서울: 인간사랑, 2011 (정명진 옮김).

Jung, C.G. (1964). Man and His Symbols. New York: Doubleday.

Nietzsche, Friedrich (1886). 선악의 저편, 황문수 옮김. 서울: 책세상, 2006.

『요한의 비밀서』 (ca. 2nd c.). 나그 함마디 문서,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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